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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논술] 시_시를 쓴다는 것은… 정의를 지켜낸다는 것은…

2010/10/21 06:20:26

시는 무엇일까? 국어 교과서의 한 챕터 같은 질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릴 수 있는 대답은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는 고리타분한 결론이다. 아직 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미자는 실제로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생님은 말한다. 시는 보는 것이지만 그냥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힘들게 찾아내야 겨우 보이는 것이라고. 말 잘 듣는 학생인 미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여태껏 무심하게 흘려봤던 일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위해 노력한다. 종이 위에 시어를 적어나간다. 영화도 함께 이 과정에 동참한다. 카메라는 설거지통에 가득 담겨 있는 그릇들을 비춰주고, 탁자 위에 무심히 놓여 있는 꽃을 비춘다. 이것이 바로 시일까? 여기에 과연 시가 숨어 있을까?

시를 찾는 여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미자는 사과를 하나 꺼내놓고 뭔가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깎아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역시 사과는 보는 게 아니라 먹는 거지." 그녀가 시어를 잘 찾지 못하는 이유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기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그녀는 시를 쓰기 어려운 장애를 안고 있다. 단어와 기억을 하나씩 잃어버리는 치매에 걸렸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단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통에 아름다운 시어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한 편의 시를 써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힘겨운 일상 위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겹쳐놓는다. 마을에서 벌어진 한 소녀의 자살 사건에 얽힌 이야기다. 치매 진단을 받고 병원을 나오는 길에 미자는 한 여자의 울부짖음을 듣게 된다. 여자의 딸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 것을 비관해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소녀의 엄마는 오열하고, 미자는 그 장면을 본다.

호기심 많은 미자는 왜 꽃같이 젊은 여자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를 궁금해하며 손자에게 묻는다. "너희 학교 애 같던데 아는 것 없니?" 시간이 흐르고 나서, 미자는 이 사건에 손자가 깊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녀를 집단으로 강간한 소년 중 하나가 바로 손자였던 것.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애쓰던 미자는 혼란에 빠진다. 그녀가 아름다운 시어를 찾기 위해 손을 내밀수록, 현실에서 만져지는 것은 온통 오물처럼 추악한 것뿐이다. 사건에 연루된 남자 아이들의 부모는 함께 모여 이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지을 방법을 연구한다. 피해자 가족에게 돈을 건네주자고 말한다. 몇백만 원씩 돈을 갹출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돈이 없다. 없는 돈을 만들어낼 방법은, 또 추악한 수단뿐이다.

영화 '시'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점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질문의 범위를 넓혀간다. 시와 정의는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공통분모가 많은 단어다. 시가 수학처럼 딱 떨어지는 아름다움이 아니듯, 정의도 수학공식처럼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주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유기체적인 성격을 지녔고, 그러기에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와 정의의 속성이다.

미자는 뒤늦게 깨닫는다. 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결코 아름다움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의가 결코 절대적인 진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영화는 두 가지 질문을 하나로 겹쳐 놓으며 시와 인간, 시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던져준다.

마지막 장면은 손자를 형사의 손에 넘긴 후 평화롭게 배드민턴을 치는 미자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공이 나무에 걸리고 여자는 나무에서 공을 털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삶은 늘 이런 난제를 풀어내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과정 안에서 어떤 느낌으로 남은 '심상'이 시가 되고, 인생이 된다. 여자는 시를 완성하고 소녀가 몸을 던진 다리 위에서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멀리서 볼 땐 단정하게 흐르는 것 같던 강물이 거친 물살을 이루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이제 우리는 미자와 함께 이 강물을 바라보며 인생을 느낄 차례다.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이, 드디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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