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뭘 알아야 말이죠. 그저 밥해 먹이고, 빨래해주고, 그것뿐인걸…. 가슴이 떨리고 미안해서 아들한테는 제대로 얘기도 못 했어요. 아들에게 '어머니가 아이들 잘못 키웠다'고 원망 들을까 싶고…."
저소득층 밀집지역인 지훈이네 동네에서 게임 중독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근처 임대주택(66㎡·20평)에 사는 민섭(가명·11)이도 엄마(43)가 일만 나가면 '서든어택'이라는 폭력성 강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지낸다. 함께 사는 외할머니(70)는 "애한테 아무리 컴퓨터 그만 하라고 해도 내 입만 아프다"며 동네 '떴다방'(노인들을 대상으로 건강식품·생활용품을 파는 임시 영업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이와 씨름하느니 생필품이라도 타오겠다는 심산이다.
"니가 나를 쏴 죽였어? 그럼 나도 너 죽일 거야. XX 다 죽일 거야. XX."
게임에 몰두한 민섭이의 입에서 온갖 험악한 욕이 쏟아져 나왔다. 민섭이는 학교가 파한 뒤 엄마가 귀가하는 새벽 2~3시까지 게임을 한다. 방학 때는 밤을 새워서 게임을 하고 이튿날 오전 10~11시에 간신히 부스스 일어났다. 컴퓨터가 고장 나면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우울감에 시달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만 엎어져 있고, 일 나간 엄마에게 수십통씩 전화를 걸어 "컴퓨터를 고쳐놓으라"고 들들 볶는다.
◆학교는 무대책이었다아이들이 인터넷 중독에 빠진 건 일차적으로 보호자인 가족들의 무지와 무관심 탓이다. 하지만 학교도 이들을 세심하게 보살펴주지 못했다. 지훈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3~4시다. 민섭이는 3시쯤 집에 와서 1시간 정도 태권도학원에 다녀온다. 이후 시간은 두 아이 모두 '자유시간'이다.
1학년 때 컴퓨터를 얻은 지훈이는 3년 넘게 게임에 빠져 살았다.
'작은자리지역자활센터'라는 지역 아동복지센터에서 작년 이맘때 컴퓨터방에 콕 처박힌 지훈이를 찾아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 기관은 저소득 가정 아이들 돌봄사업 중 하나로 지훈이, 민섭이를 포함한 이 동네 꼬마 22명에게 하루 3시간씩 1년간 교사를 집으로 보내 학과 공부를 봐주게 했다.
지훈이는 요즘은 저녁 7시까지는 지역 아동센터에서 숙제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지훈이 할머니는 "진작 지역아동센터를 소개받았거나 하루 두어 시간씩이라도 젊고 똑똑한 사람이 아이들을 돌봐줬다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혼자 있는 아이들이 문제다작은자리센터 최명순 팀장은 "아무리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컴퓨터 없는 집은 없고, 아이들이 혼자 집에 있는 동안은 전부 컴퓨터 게임을 한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민섭이를 맡은 김현선(가명·44)씨는 "어른들이 방치하니까 민섭이가 사람과 소통하는 대신 컴퓨터에 일방적으로 자기감정을 쏟아붓는 것 같다"고 했다.
작년까지 지훈이는 누가 장래 희망을 물으면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만난 지훈이는 기자 질문에 "꿈 같은 거 없다"는 한마디뿐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게임 외의 세상엔 마음을 닫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