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주의(復古主義) 운동 전개조맹부는 당시 복고주의를 주창했다. 그림에서는 바로 앞선 남송시대의 화풍을 타파하고, 그보다 앞선 당과 북송시대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서예에서도 당나라의 안진경 이래로 송나라에서 성행했던 서풍을 배격하고, 진나라 왕희지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조맹부는 왕희지의 글씨를 깊이 연구해 후대의 서예에 큰 영향을 준 '조체(趙體)' 또는 '송설체(松雪體)'라 불리는 아름답고 세련된 자태의 독창적인 글씨를 만들어 냈다. 그의 글씨는 잘 정돈됐으며 근엄하면서도 우아한 운치가 있다. 필법은 둥글고 윤택하면서 굳세며 흐름이 유창하다. 글씨에 아름다운 형태미를 불어 넣어 왕희지의 전통적 서예미를 충실히 계승, 부활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송설체는 중국은 물론 고려 말부터 조선 전반기까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조선 초기 서예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견 작)'의 발문이 있는데, 이는 조맹부의 '송설체'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조맹부는 화법 또한 독창적이어서, 글씨를 쓰는 붓과 그림을 그리는 붓은 같은 사용법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세웠다. '글씨와 그림은 본래 하나'라는 뜻의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과 '서예의 필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서화일치론(書畵一致論)'을 만들었다. 이는 후대 중국 미술사에서 큰 영향력을 차지하는 문인화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더 생각해볼 거리많은 한족의 지식층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던 것에 반해 조맹부는 송나라 황실 후손이면서도 이민족 국가인 원나라의 관리로 출세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배반자였던 셈이다. 비난을 받는 조맹부의 정치성과 뛰어난 서화작품의 예술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