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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망상을 빙의글로 만들어 드립니다. 원하는 아이돌그룹 멤버와 내용을 댓글로 적어주세요.’
10대가 즐겨 찾는 팬픽(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진화하고 있다. 독자가 제3자의 입장이 아닌 주인공으로 빙의해 좋아하는 아이돌그룹과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진다. 최근에는 독자의 사연을 토대로 한 맞춤형 소설까지 나오는 상황. 인기가 높아지면서 서적으로 자극적인 소재를 이용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례도 잇따른다.
◇아이돌 멤버와 오늘부터 1일
빙의글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뷔 빙의글’ ‘아이유 빙의글’ ‘백현 빙의글’ 등 본인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을 앞글자에 붙여 검색하면 된다.
빙의글의 가장 큰 특징은 연예인과 관계 맺는 주인공의 이름을 ‘여주(여주인공)’ 혹은 ‘남주(남주인공)’로 적는다는 것.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다.
팬픽이라고 해서 줄글만 나열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사진과 움짤(움직이는 사진이나 그림), 음악을 곁들여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이별하는 장면에서는 구슬픈 발라드와 아이돌 멤버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움짤로 첨부하는 식이다.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가상의 현실 속에 서 있게 된다.
일년 넘게 빙의글을 봤다는 서울 소재 중학교 3학년 임모양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아이돌그룹 멤버와의 연애를 실제로 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빙의글에는 세계관이라는 양념도 추가된다.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센티넬, 운명의 짝 이름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는 내용의 네임버스, 영국의 판타지소설 ‘해리포터’의 마법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호그와트 등 세계관 종류도 다채롭다.
자기 표현과 소통에 익숙한 Z세대는 단순 소비자에 머물지 않는다. 원하는 주인공과 에피소드를 세세하게 적어 작가에게 요청한다. 대구에 사는 고등학교 1학년 최모양은 “원하는 내용이 빙의글에 반영됐을 때 심리적 만족감과 뿌듯함이 크다”고 말했다.
◇잘못된 성 관념 심어줄 우려도
전문가들은 달라진 아이돌그룹의 이미지가 빙의글의 등장과 인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아이돌을 우상, 즉 본인과 다른 존재로 여겨 멤버들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며 “반면 최근에는 아이돌에 친근감을 느끼고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팬픽의 형태도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자극적인 소재를 많이 다룬다는 점에서 빙의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글을 직접 쓰고 즐기는 학생들조차 공감하는 부분이다. 경남 진해에 사는 고등학교 2학년 이모양은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강간에 의해 임신을 한다는 등 성적으로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자칫하면 학생들에게 잘못된 성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학교 2학년 김시연양 역시 “수위가 지나친 글들은 성인물로 분류해 어린 학생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팬픽을 가장한 연예인 인권 침해, 성희롱을 처벌해달라’는 글이 이어진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작품 과몰입도 우려되는 부분”면서 “기업에서 이를 상업적으로 악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청소년의 성장 발달과 현실에 맞는 제재가 이뤄져야 한다”며 “규제가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어 개인의 자정 능력도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hajs@chosun.com
[NOW]‘빙의글’에 빠진 10대…자극적인 소재도 봇물
-청소년들 “연예인과 연애하는 기분 만끽”
-독자 관심 끌려 강간 등의 소재 다루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