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우리가 ‘숲’이 돼야 할 때
기사입력 2020.07.03 09:02
  • 법정에 한 남자아이가 허름한 옷을 입은 채 원고 측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피고 측에는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40대 남녀가 앉아 있습니다. 판사는 원고 측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누구를 고소하나요?”라고 물었고, 앳된 아이는 망설임 없이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제발 부모가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막아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이 낯설고도 황당한 장면은 바로 레바논 출신의 영화감독 ‘나딘 라바키’가 연출한 ‘가버나움(Capernaum)’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자인’은 자식의 나이도 모르는 부모 밑에서 노동과 빈곤 그리고 폭행의 학대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부모의 방치 속에서 정작 동생들을 돌보는 건 주인공 ‘자인’이고, 돈을 받고 팔려 간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여 감옥에 가는 것도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된 ‘자인’입니다. 결국, 감옥에서 ‘자인’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부모를 상대로 고소하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불편했지만 진한 감동이 남아 있었던 영화 ‘가버나움’이 떠올랐던 건, 최근 연이어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들 만큼 최근 경남 창녕과 충남 천안에서 두 아이가 부모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했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해 이유는 ‘육아 스트레스’였고, 안타깝게도 한 아이는 사망하고 한 아이는 구출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아이를 만나서 보듬어주는 조치를 취하라”라고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몇 년 전, 저는 한 고등학생 남자아이로부터 아버지를 고소하고 싶다는 ‘가버나움’ 같은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음주 폭행 때문에 자신은 물론 여동생까지 학대를 당하고 있어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저의 부탁대로 아버지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고, 덕분에 아이가 알지 못했던 아비의 눈물을 보고서 ‘원망’ 대신 ‘치료’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아동학대 사건을 계기로 문득 아버지를 고소하고 싶다던 아이가 떠올라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해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또 당시 특성화고에 다녔던 여동생은 이미 취업이 확정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들려주었습니다.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던 아버지는 이제 약물치료를 마치고 회복되어 지금은 경비업체에서 근무한다는 근황을 전해주었습니다.

    아이는 모르지만, 당시 저는 아이와 대화를 마친 후 관할 지구대를 찾아 이 사실을 알려주고, 아이의 집 주변을 살피며 이웃들을 찾아 폭력의 정황들을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이후라도 가정폭력 징후가 보이면 보호 차원에서 신고해달라는 부탁까지 했었지요. 이웃을 찾아 신고를 부탁한 이유는 가정폭력은 이웃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 무엇보다 아이가 제게 연락한 달이 ‘어버이날’이 있던 ‘5월’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라는 흔한 이야기가 있죠. 하지만 최근의 끔찍한 아동학대를 다시 마주하면서 이 흔한 이야기를 이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나서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더 이상 아동학대가 개인 가정의 서사로 마침표를 찍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동의 문제는 곧 우리 자녀의 안전과도 개통되는 문제이고, 분명한 건 ‘사회악’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양육한다는 건, 부모가 자기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자주 바닥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역시 바닥을 짚고 있을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게 때로는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동학대 같은 끔찍한 사건들을 마주하면, 외부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작은 존재’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집에서 머무르기’가 권장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은 위기 아동들에게 더 가혹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드러나는 아동학대 사건이 내 자식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아동학대 방지를 위해 지금이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소심한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선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많은 부모에게 “왜 부모를 선택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부모를 선택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선택했다고 하니 꽤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결혼을 약속할 때 “좋은 부모가 되겠다”라는 약속도 함께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생략되어 있었을 뿐이죠.

    ‘부모’라는 존재는 아동학대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같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는 모든 아동의 부모이자, 같은 선택을 한 동지로서 서로가 ‘공동체 운명’이라는 존재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스웨덴과 노르웨이 같은 해외 사례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부모를 알아가고 또 서로 보완해주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해 부모끼리 서로의 교육자가 되어 주고, 또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부모라면 아이를 대할 때 몸을 숙이고 대화하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부모가 있을 수 있고, 모를 때는 알려주는 것이 맞습니다. 부모가 아이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도 알려줘야죠. 길을 걸을 때 아이가 부모 뒤를 졸졸 따라가는 모습은 위험할 수 있다는 조언도 놓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경험한 부모로서 본인의 경험을 아끼지는 말자는 뜻이기도 하고, 자식을 위해 부모는 살가운 조언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유독 부모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는다면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말로도 소통하지만, 신체 접촉으로도 소통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옆집에 아이가 있는 것 같은데 아이를 자주 보지 못한다든지 이해할 수 없는 상처를 발견하게 되면 이 또한 ‘합리적 의심’을 해보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했는데도 달라진 게 없다면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을 방문하거나 ‘112’로 경찰에 신고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이와 부모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신고란, 부모를 처벌하는 ‘응보적 의미’가 아니라 아이를 보호하고 부모를 보호하는 ‘회복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동학대를 예방한다는 건, 학대할 가능성이 있는 예비 부모를 마주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부모에게 ‘중요한 타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동을 지킨다는 건 가정을 지킨다는 것이고, 또 부모를 지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심’과 ‘신고’는 아동학대를 예방하는 데 큰 ‘숲’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아동학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학대를 당하는 아이를 구하는 일이 곧 우리 아이를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