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할머니는 글 쓰고, 손자는 그림 그리고… 우린 둘도 없는 '친구'랍니다

울산=최지은 기자

2020.02.18 15:13

해당기사 크게보기 해당기사 작게보기 이메일발송 해당기사 프린트
페이스북 트위터

손자와 동화책 낸 권비영 작가

"할머니, 내 동화책 언제 나와?"

손자의 한마디에 할머니 마음이 바빠졌다.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할머니가 손주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손자는 그림을 그렸다. 베스트셀러 소설 '덕혜옹주'를 쓴 권비영(65) 작가와 성시후(10) 군의 합작품 '택배로 부탁해요'는 그렇게 두 달 만에 출판 준비를 마쳤다.

지난 10일 울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 작가와 시후 군은 서로 눈만 마주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55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는 '친구'였다. "엄마·아빠는 하지 말라는 게 많은데, 할머니는 항상 제 편을 들어줘요. 할머니랑 수다 떠는 것도 재밌어요. 한마디로 우린 '쿵짝'이 잘 맞아요!" "얘, 원래 모든 할머니는 손주 편이야(웃음)."

기사 이미지
권비영(왼쪽) 작가는 “꼬물거리는 손주를 보고만 있어도 아이의 감정이 느껴진다”며 “애들이 소재를 주고 난 그저 대필(대신 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시후 군은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울산=김종연 기자
'별 같은 손주'의 모든 것이 글 재료

"아들 둘을 키울 땐 아이가 이렇게 반짝이는 존재인지 몰랐어요.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섰지. 손주는 마냥 예뻐요. 애들을 보면서 생명의 소중함, 존귀함, 사랑스러움을 절절히 느껴요."

권 작가는 별[星] 같은 손주 셋을 뒀다. 큰아들의 딸 지유(9)·유나(7) 양과 작은아들이 낳은 시후 군이다. 권 작가는 손주들과의 에피소드를 틈틈이 글로 남겼다. 아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할머니 눈에는 훌륭한 글 재료였다.

지난해 초에는 시후 군에게 "네가 한 살 더 먹기 전에 너를 주제로 동화책을 내주마" 약속했다. 이를 까맣게 잊고 있던 권 작가에게 같은 해 10월 시후 군이 "동화책은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출판을 준비했다. "해가 가기 전에 책을 완성해야 하는데, 삽화(책 속 그림)를 따로 맡길 시간이 없는 거예요. 고민하다가 아이 그림을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후 그림을 다 가져오라고 했죠. 시후가 다섯 살 때부터 그린 그림들이에요. 출판사에서도 보더니 너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책을 같이 내게 됐는데, 하고 보니 훨씬 의미 있어요."

책은 지난해 크리스마스(12월 25일)에 선물처럼 시후 군에게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는데 책상 위에 책이 떡 놓여 있는 거예요. 단숨에 다 읽었어요. 할머니 글이 붙으니까 제 그림이 특별해진 것 같았어요."(시후) "할머니는 네 그림이 들어가서 더 뿌듯해."(권 작가)

기사 이미지
시후 군이 그린 가족. (왼쪽부터) 아빠·시후·엄마의 모습을 정겹게 그렸다.
"승자야!" 시후가 할머니 이름 부른 사연

권 작가는 지금까지 어둡고 처연한 분위기의 글을 주로 썼다. 여성의 질곡 있는 삶을 그린 그의 소설을 보고 사람들은 "눈물이 고여 있다"고 말한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삶을 다룬 '덕혜옹주', 가정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소녀 이야기 '은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세 소녀에 대한 '몽화' 등이 모두 그랬다. '덕혜옹주'는 2016년 영화로도 제작됐다. "내가 생각해도 밝은 소설이 없었어요. 이번에 동화를 쓰면서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썼어요. 경험이 바탕이 되니 술술 써지더라고요."

책에는 동화 여덟 편이 실렸다. 시후 군이 가장 아끼는 이야기는 '할머니는 내 친구'다. 80살이 넘은 이모할머니(권 작가의 언니)와 당시 7살이던 시후 군이 '진짜 친구'가 된 경험을 쓴 글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로 했고, 이모할머니는 "친구답게 서로 반말하며 이름을 부르자"고 했다. 시후 군이 "승자야!" 대뜸 할머니 이름을 부르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어른들은 당황해 시후 군을 야단쳤다. 권 작가는 "정작 이모할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했다. "애 기운을 받아 젊어지는 것 같다면서 좋아하더라고요. 동방예의지국에서 말이 안 되는 짓이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그치?"(권 작가) "그냥 친구 대하듯이 했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던데요?"(시후)

권 작가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할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그린 '택배로 부탁해요'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손주가 보고 싶어 "농작물을 직접 가져가라"고 전화한 할아버지에게 시후 군은 "택배로 부탁해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엄마더러 너를 택배로 보내라 그래라"고 받아쳤다. 권 작가는 "'택배로 부탁한다'는 말이 우리 시대 가족관계를 나타낸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택배가 편리하긴 하지만, 만날 일이 줄어드니 정(情)은 사라지고 자꾸 삭막해져요. 할머니·할아버지에게는 서운하고, 자식들에게는 편리한 말이에요."

권 작가는 또 다른 손주인 지유와 유나 맘이 상할세라 자매를 주제로 동화책을 더 낼 예정이다. "세상을 밝고 건전하게 꾸려가는 힘은 가족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가족이 어깨만 두드려줘도 큰 위로가 되잖아요.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나고도 할머니와 손자의 수다는 계속됐다. "우리 시후를 한 달에 한두 번 보나…. 학원 다니고 축구 한다고 얘가 나보다 더 바빠요. 그래도 자주 안 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얘가 날 보는 눈빛이 참 그윽하거든요. 자꾸 보다가 우리 시후 눈빛에 녹으면 어떡해(웃음)."

이메일발송 해당기사 프린트 페이스북 트위터

목록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