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너머 신세계로… 그림책을 펼치세요
조선일보
기사입력 2019.12.02 09:03

제이와이북스 칼럼

  • 로라 바카로 시거의 ‘블루(Blue)’<노부영 원서와 CD>./제이와이북스 제공
    ▲ 로라 바카로 시거의 ‘블루(Blue)’<노부영 원서와 CD>./제이와이북스 제공

    그림책은 글과 그림을 엮어서 만든 제3의 공간, 책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림책의 모양과 제본의 특징을 비롯해 타이포그래피, 인쇄한 종이의 질감, 눌리고 튀어나온 재단의 면과 선, 사용한 물감의 특성은 모두 한 권의 그림책이 전하려는 의미와 관계를 맺고 있다.

    뛰어난 시(詩)와 음악을 담은 것도 그림책의 특징이다. 좋은 그림책의 문장은 낭독형 문장이다. 읽을 때 리듬감이 있어 훨씬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눈으로는 그림의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입으로는 소리 내 읽으며 문장을 자연스럽게 외울 수 있는 것도 그림책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다. 글자를 못 읽는 어린이가 누군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되풀이해서 듣다가 책을 모조리 외워버리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그림책의 글은 언어의 풍요로운 특성을 담은 고밀도 문학이다. 그림책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영어 표현은 대표적으로 의성어, 의태어다. 그림책의 글을 통해 문장의 상징적 감각, 은유적 표현 등 실용 영어 문장에서 익히기 어려운 부분도 익힐 수 있다. 그래서 어른도 그림책부터 영어 문학작품 읽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책의 글은 시적 언어여서 번역이 어렵기도 하다. 로라 바카로 시거의 그림책 '세상의 많고 많은 파랑'은 파랑에 대한 헌사를 담은 걸작이다. 원서 제목은 '블루(Blue)'다. 한 어린이가 청년으로 자라기까지 겪는 사건들을 Blue를 중심으로 뒤따라간다. Blue는 영어에서 중의적 의미가 있다. '파랑'이면서 '슬프다'는 뜻을 내포한다. 번역에서는 이 슬픔을 전하기 어렵다. 번역자인 김은영 시인은 까다롭게 낱말을 골라 파랑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겼지만, 이 책에서 가장 대단한 장면인 'so blue'의 힘은 오직 원작에서만 느낄 수 있어서 아쉽다. 이처럼 언어의 벽을 넘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원작도 읽어보라고 권하는 작품은 여럿 있다. 앤서니 브라운의 'Changes'는 영어로 읽지 않으면 제목의 재치를 놓치게 된다. 칼데콧상을 수상한 'Radiant Child'에서 영문 글자체가 주는 미감도 원작에서만 느낄 수 있다. 같은 상을 받은 'Last Stop on Market Street'는 '행복을 나르는 버스'로 번역됐는데 Market Street가 전하는 도시의 현장감은 아쉽게도 줄어든다. 문화적 다양성이 이 그림책의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원작을 병행해서 살펴보는 것이 독서의 폭을 넓히는 일이다.

  •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그림책 그림은 문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시공간의 분위기와 문화·역사적 맥락까지 드러낸다. 작가는 장면마다 함축적인 그림의 언어를 구사한다. 현란하게만 제작된 그림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일이다. 좋은 그림책은 갤러리에 걸린 작품처럼 책을 넘길 때마다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린이에게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그림책을 보여준다는 것은 글자 배우기를 뛰어넘는 통합적인 예술 교육의 경험을 제공하는 셈이다. 그림책을 구매하기 전에 그 그림책의 작가는 어떤 세계를 그려온 사람인지, 작품은 어떤 예술적 평가를 받았는지 잘 살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아이가 읽고 좋아해요" 등의 비(非)전문적인 리뷰는 좋은 그림책과 무관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림책을 알게 된다는 것은 글과 그림을 너머 신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권할 만한 일이다. 독자가 몇 살이든 지금도 전혀 늦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