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756건’ 글꼴 저작권 분쟁에 몸살 앓는 교육계
이재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9.10.17 14:00

-수도권 교육청 3곳 잇단 패소로 지방 교육계도 긴장
-‘정황상 침해’ 인정한 법원에 ‘무리한 판결’ 비판도
-저작권 교육 등 예방 조치 외 뚜렷한 대책 없는 정부
-글꼴업체 “저작권 장사 매도 유감, 원만한 협의 바라”

  • #. “불법으로 폰트파일을 내려받지 않았는데 저작권 침해라고 하니 억울하죠. 상급기관이나 학생이 보낸 문서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떤 글꼴이 사용됐다며 5년 전 문서를 내미는데 그 당시엔 근무도 하지 않았어요.” 

    일선 학교와 시·도교육청이 글꼴 저작권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서울 등 수도권 교육청이 잇달아 글꼴 저작권 업체에 패소하면서, 학교를 노린 저작권 업체의 소송은 줄을 이을 전망이다. 정부도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관망만 하는 모습이다. 

    17일 교육계에 따르면, 서울시교육청은 글꼴제작업체 윤디자인의 글꼴을 무단 사용해 손해배상청구소송에 피소됐다. 1심에선 이미 패소했고, 오는 18일 항소심 결심공판을 앞뒀다. 전망은 밝지 않다. 이미 지난해 인천시교육청이 대법원까지 가는 민사소송 끝에 패소한 탓이다. 인천교육청은 2016년 8월 윤디자인으로부터 글꼴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손해배상청구소송에 피소돼 상고심까지 패소했다. 경기도교육청 역시 같은 소송에서 최근 2심 패소선고를 받았다. 

    ◇ 초·중·고 714건 교육청 44건 등 … 유사 소송 확산 조짐도

    관련 분쟁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이찬열 국회 교육위원장(바른미래당)이 교육부로부터 교육청과 초중고 대상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난 2015년부터 올해까지 교육청과 학교가 글꼴 저작권 침해로 분쟁이 벌어진 사례는 전국적으로 756건에 달한다. 초등학교 214곳, 중학교 206곳, 고등학교 292곳이 분쟁에 휘말렸다. 지역 교육청도 44차례 분쟁에 시달렸다. 

    소송을 제기한 글꼴 제작업체는 수개월 이상의 채증기간을 거쳐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관내 한 사립 중학교 피소내용을 보면, 2011년 문건까지 글꼴 저작권 위반 증거자료로 포함돼 있다. 저작권 업체가 학교의 글꼴 저작권 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윤디자인의 저작권 소송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유사업체의 관련 소송도 확산할 조짐이다. 이미 서울시교육청은 윤디자인을 제외한 글꼴 제작업체 3곳으로부터 저작권 침해 관련 내용증명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육청 내에서 저작권 관련 업무를 담당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까지 퍼지고 있다. 

  • ◇법원 ‘정황상 저작권 침해’ … 무리한 판결 지적도

    문제는 법원도 교육청·학교가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내 저작권법은 글꼴 자체를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글꼴을 담은 폰트파일을 저작물로 인정한다. 폰트파일을 불법으로 내려받지 않았다면,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다. 

    인천교육청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보면, 교육청·학교가 폰트파일을 불법 내려받기했다고 확정한 대목은 드러나지 않는다. 법원은 윤디자인 측이 증거로 제시한 문건이 교육청·학교 교직원에 의해 학교에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고, 교육청·학교 관계자가 아니면 폰트파일을 학교 컴퓨터에 내려받기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할 수 없는 교육청·학교 관계자가 폰트파일을 불법 내려받기했을 가능성이 있어 글꼴 저작권 위반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실제로 불법 내려받기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정황상 내려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유죄란 것이다. 

    이런 판결은 다소 무리했단 지적이다. 저작권 소송을 다뤄온 구주와 변호사(법무법인 강)는 원고(윤디자인)의 법적 부담을 덜어준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구 변호사는 “해당 판결은 글꼴이 사용된 사실 자체만으로 폰트파일에 대한 복제권과 불법 내려받기 등 저작권 침해를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원고의 입증책임을 무리하게 완화해준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구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인해 글꼴 저작권 관련 민사소송이 증가하는 추세다”고 덧붙였다. 판결이 유사한 분쟁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단 것이다. 

    ◇ 정부는 예방주력 … 저작권 교육 강화·폰트 감식 프로그램 배포 

    이처럼 수년째 글꼴 제작업체의 분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부는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해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다. 교육부 이러닝과 관계자는 “소송마다 사정이 달라 정부가 개입하기보다 시·도교육청과 협의해 처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저작권 분쟁 사실을 인지한 뒤 지난해 7월부터 불법 폰트파일을 가려낼 수 있는 점검프로그램 2종을 일선 학교에 배포하고, 저작권 관련 교육을 강화하는 예방적 조처를 하고 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산하 저작권지원센터는 5144개 초중등학교를 대상으로 글꼴 저작권 관련 교육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저작권 분쟁에 휘말린 한 서울 시내 중학교 관계자는 “글꼴 제작업체가 일종의 저작권 침해를 빌미로 합의금을 노리거나 글꼴 라이선스를 판매하려는 저작권 장사에 나선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며 “저작권을 보호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간의 상황에 대해선 협의하고 개선을 할 수 있는 계도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글꼴 저작권 침해 배상 관련 자료 통계. /이찬열 의원실 제공
    ▲ 글꼴 저작권 침해 배상 관련 자료 통계. /이찬열 의원실 제공
    ◇ “저작권 장사 매도 유감 … 교육계, 저작권보호 솔선수범해야”

    한편 교육청·학교와 소송을 벌이는 윤디자인 측은 저작권 침해를 회복하려는 활동을 ‘저작권 장사’ 등으로 매도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윤디자인 측은 저작권 소송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서면 답변서를 통해 “교육기관을 포함한 공공기관은 외국 소프트웨어에 비싼 사용료를 지불하며 정식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있음에도 폰트파일에 대해서 만큼은 저작권 인식이 부족하다”며 “거리낌 없이 폰트파일을 직간접적으로 불법 복제해 사용함으로써 지식재산권자의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해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교육기관의 이런 저작권 오인지는 지속적인 저작권 보호교육을 통해 종식돼야 한다”며 “폰트파일에 대해서도 다른 SW와 동일하게 정당히 구매해 사용해 교육현장에서 저작권보호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디자인 측은 “부득이하게 해당 교육청들과 학교에 대해 저작권 침해 소송에 이르게 됐다”며 “해당 교육기관과 원만한 해결을 위해 협의할 의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기관의 특수성을 고려해 일반 기업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글꼴 라이선스를 공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