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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는 공짜로 수업을 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죠.”
경기 고양에 사는 김민철(가명·66)씨는 복지센터에서 한 달여간 시니어를 대상으로 재능기부를 했다가 불쾌함을 느꼈다. 미술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의 태도가 영 좋지 않아서였다. “중요한 약속이 생겼다”며 중간에 나가 분위기를 흐리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결석하는 수강생도 더러 있었다. 유료로 진행되는 수업과 달리 집중력도 눈에 띄게 낮았다. 김씨는 “아무래도 무료 강의라고 하면 낮잡아보는 경향이 있다”면서 “좋은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학생들의 태도를 보니 갈수록 맥이 빠졌다”고 토로했다.
#2. 손귀자(67)씨는 최근 한 교육기관에서 4개월간 무료로 진행되는 강사 양성과정에 참여했다. 다섯 명씩 조를 짜 사진, 글, 동영상 등으로 역할을 나누고 다들 의욕적으로 수업을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강의실에 빈자리가 많아졌다. 나중에는 조를 다시 짜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할을 재분배하고 새로운 조 사람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야 했어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무료 프로그램을 듣다 보면 끝까지 교육을 이수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자서전 쓰기’처럼 내용이 어려운 수업은 20명으로 시작했다가 2명만 남기도 해요.”
퇴직한 5060이 ‘평생학습 유목민’으로 교육기관을 떠돌고 있다. 이들은 무료 프로그램을 골라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 없이 무작정 강좌만 많이 들을 경우 시간을 허비하고 재취업 골든 타임까지 놓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퇴직 후 불안감 느껴 주먹구구식 수강
평생학습 유목민을 양성하는 주된 요소는 불안함이다. 김환수(74)씨는 “퇴직 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과 조급함이 엄습해 와 무작정 많은 강의를 수강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이 준비 없이 퇴직을 맞는데, 이는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킨다.
최근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발표한 ‘2019 미래에셋 은퇴라이프트렌드 조사’에 따르면, 만 50~69세 퇴직자 1808명 가운데 65.9%가 퇴직 시기를 예측하지 못했거나 예상한 시기보다 빨리 회사를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퇴직 후 일자리나 삶에 대해 충분하게 대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예상한 시기에 일을 그만두더라도 조사 대상자 중 상당수는 회사 업무와 재취업 준비를 병행할 여유가 없거나 중장년층의 재취업 환경을 제대로 알지 못해 미리 구체적인 계획을 짜지 못했다고 답했다.
무분별한 퍼주기식 프로그램도 평생학습 유목민을 만드는 요소다. 손씨는 “요즘 지자체별로 무료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일부 중장년은 여러 지역의 수업을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가뜩이나 고정적인 수입이 뚝 끊겨 돈을 아끼려는 퇴직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주명룡(73) 대한은퇴자협회장은 “정부 지원금을 받고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성과를 내기 위해 점심까지 무료로 주면서 중장년층을 불러모으는 기관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두세명씩 몰려다니며 그런 프로그램만 찾아다니기도 한다. 같은 수업을 서너번씩 듣는 사람도 봤다”고 말했다.
◇자칫하면 재취업 ‘골든 타임’ 놓칠 수도
은퇴 전문가들은 평생학습 유목민들에게 일단 ‘시간이 많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꼬집는다. ‘100세 인생’ 시대라지만, 엄연히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은 다르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2016년 건강수명은 82.36세, 건강수명은 64.9세였다. 즉, 죽음을 앞두고 17년 정도는 다치거나 아픈 상태로 살아간다는 얘기다. 따라서 가치 있는 일에 남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바람직하다.
더욱이 재취업에도 ‘골든 타임’이 있다. ‘마흔에 시작하는 은퇴공부’(비전코리아)의 저자 백만기(67)씨는 “퇴직하고 6개월이 지나면 이전의 경력을 살려 취직하기가 어렵다”면서 “재취업을 원하는 중장년층이라면 단순히 돈이 덜 들거나 안 드는 프로그램을 찾기보다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써 향후에 도움될만한 프로그램을 고르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때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 사이에 접점을 찾아야 한다”며 “중장년 채용 수요가 높은 분야의 교육인지도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직장에 다닐 때부터 사전 준비 기간을 가지면 더욱 좋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퇴직을 맞기보다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자기계발 전략을 미리 짜보는 것이다. ‘모바일 화가’로 이름난 정병길(66)씨가 그랬다. 그는 퇴직 전 여가를 활용해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들었고 은행에서 정년퇴직 후 화가로 ‘제2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현재는 서울 양천구 목운초등학교와 중구 장충중학교에서 각각 일주일에 한 번씩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미술 수업을 진행 중이다.
평생학습 유목민의 확대를 막기 위해 교육기관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환급과정 개설이 그러한 방법 중 하나다. 수강료를 받은 뒤 자격증을 따는 등 성과를 내거나 프로그램을 100% 이수한 교육생에 한해 수강료를 되돌려주는 과정이다. 출석율이 저조하거나 평가를 거쳐 성적이 저조한 학생은 다음 번 강의 수강에 제약을 가하는 식의 규정을 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백씨는 “일부 지자체장은 제한된 임기 내에 실적 위주의 행정을 펼치기 위해 무료 프로그램을 퍼주는데 급급하다”면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중장년층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퇴직 후 ‘평생학습 유목민’ 되는 중장년, 왜?
-불안감·조급함 탓에 무작정 많은 강의 수강
-“시간 허비하다 재취업 골든타임 놓칠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