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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망’ ‘대박자’ ‘자해러’….
최근 청소년 사이 유행한 말이다. 풀어쓰면 ‘이번 생은 망했다’ ‘대가리 박고 자살하자’ ‘자해하는 사람’이다. 삶을 자조하는 태도는 말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작년 말에는 자해를 SNS에 인증하는 유행이 일기도 했다. 교육부가 작년 진행한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고생 중 자해를 경험한 학생은 최소 7만여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 아래에는 아이들의 다친 마음이 있습니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54)는 이처럼 설명했다. 김천 소년 교도소에서 1992년 공중보건의사로 복무하며 어떤 아이들에게는 공부가 아닌 치유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를 계기로 방황하고 상처받은 청소년을 위해 대안학교 ‘성장학교 별’을 2002년에 설립해 지금까지 교장을 지내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아이들을 상담한 경험을 담아 최근 ‘요즘 아이들 마음고생의 비밀(해냄)’을 펴낸 그는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어른이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 과잉 학습, 약해진 인간관계 … 아이들의 마음 덧난다
자해 유행은 아이들의 병든 마음이 드러난 사회현상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아이들은 마음이 고통스럽다 보니 이를 회피할 방법을 찾아 자해한다”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잊고자 하는 심리에서 손목을 긋고, 그렇다고 아무도 몰라주면 너무 쓸쓸하고 외로우니 SNS에라도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이 아이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걸까. 그는 ‘과잉 학습’을 주된 이유로 꼽았다. 김 교수는 “부모의 기대는 대게 ‘공부 잘하는 것’ 하나로 수렴한다”며 “이런 부모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아이는 극히 소수”라고 했다. 이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뿐더러, 스스로도 맘에 안 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기혐오 감정이 생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고민을 해결하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과거에는 형제·자매, 친척, 동네 어른처럼 자신의 아픔을 나눠줄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야기할 사람 자체가 줄었죠. 요즘 아이들에게 형제는 없거나 한 명인 경우가 많고 부모님은 바빠 고민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죠. 이야기 나눌 사람이라곤 친구에 그치는데, 친구들마저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이들의 좌절감은 더 커집니다. 괴로운 마음을 풀어보려 자신을 해하는 아이들이 나타나는 거죠.”
하지만 이런 아이의 모습을 어른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 상담하며 만난 부모들은 ‘아이가 힘들어 하는 줄 몰랐다’ ‘그건 힘든 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고민을 어렵사리 털어놓은 아이에게는 ‘네가 정신을 못 차린 거다’ ‘공부할 조건을 모두 만들어줬는데 공부가 왜 힘드냐’고 했다. 그는 “이미 고생하는 아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반응”이라며 “아이들이 공감받지 못해 서러워하며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 덧붙였다. -
◇ “아이들의 마음고생 인정하는 게 첫걸음”
아이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그가 말하는 첫 번째 단계는 ‘아이들의 마음고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아주기만 해도 상황은 훨씬 좋아진다. 하지만 어려워하는 어른들을 위해 김 교수는 “서로 자라온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고 전했다.
“부모 세대는 성장기에 불안함이 없었어요. IMF 이전까지 사회가 발전하는 걸 목격하며 자랐죠. 먹고 사는 게 나아지고, 아파트 평수는 늘어나는 소위 경제 확장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살만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라요. 불안기에 성장했어요. 아이들이 주로 들어온 이야기는 ‘커도 일자리가 없다’ ‘노인은 많아서 부양하기 힘들 것이다’와 같은 부정적인 전망입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우울함이나 수동성은 시대적인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아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면, 다음은 아이에게 거는 기대를 조정해볼 수 있다. 물론 기대치를 낮추는 건 쉽지는 않은 과정. 그는 “부모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아이 때문’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내 꿈이었기 때문에, 내려놓는 데는 부모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면서도 “부모가 이해할 것 같이 이야기하지만 결국 기대를 바꾸지 않을 때, 아이는 부모가 돕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노력하면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모에게는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현재 단계에서 부모가 기대하는 수준을 맞추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안한다고 여기면 미운 감정이 들지만,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라 마음이 이전보다 편해집니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자식이 아닌 다른 인생의 목표를 찾을 수 있다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저 자식하나 잘 되는 것만을 부모의 인생으로 제한하지 마세요. 부모가 스스로의 삶에서 아이 말고 다른 희망을 만드는 노력을 한다면 좋겠어요. 병원을 찾은 아이들이 바라는 것도 부모가 그 자신을 위해서 사는 거였습니다. 부모부터 생기 넘치는 삶을 산다면 아이들도 희망을 가질 겁니다.”
“뭐가 힘드냐고요? 요즘 아이들도 마음고생 한답니다”
-[인터뷰]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의학과 교수(성장학교 별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