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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으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건 영어와 외래어였습니다. 17살에 알파벳을 처음 접했죠. 중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처음으로 영어시험 0점을 받았고요. 하지만 이젠 5단계 공부법을 활용해 습득한 영어 실력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탈북민 이성주(31)씨는 열여섯 살이던 2002년 한국에 왔다. 2년 뒤 네 살 어린 친구들과 같이 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북한과 전혀 다른 교육과정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첫 중간고사 때는 영어 과목에서 0점을 맞아 전교 꼴찌를 했다. 점수를 올리려 무작정 영어 단어부터 외웠다. 하지만 단어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온갖 해프닝을 겪었다. 백화점 전단지 속 ‘폭탄 세일(Sale)’이란 말을 실제 폭탄을 파는 것으로 잘못 이해해 직원과 말다툼을 벌이고, 아파트 단지 내 세탁소 간판에 적힌 ‘컴퓨터 클리닝(Computer cleaning)’을 보고 고장 난 컴퓨터를 맡기겠다고 해 세탁소 주인과 승강이를 벌인 날도 있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공부법을 찾고자 고군분투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이씨는 어떤 모습일까. 오는 9월부터 그는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워싱턴D. C 인근의 조지메이슨대에서 분쟁 분석 및 해결학 박사 과정을 밟는다. 지난 2016년 9월에는 북한에서의 삶을 담아낸 ‘Every Falling Star’(번역본 <거리 소년의 신발>)가 영어권 나라에 동시 출간되면서 미국에서 ‘주목할 만한 도서(청소년 사회과학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열일곱 살에 알파벳을 처음 본 이씨로서는 놀라운 변화다. 그는 “영어를 꼭 정복하겠다는 간절함과 영어 공부를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며 “더 넓은 세계로 나가 경쟁하고 싶다면 효과적인 영어 공부법으로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 공부 방황기 “단어장 씹어 삼키고, 앵무새처럼 무작정 따라 해”
이씨가 영어 공부로 달성하고 싶었던 첫 목표는 ‘꼴찌 탈출’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당시 영어 점수가 가장 높았던 반 친구에게 비법을 묻자, 영어 단어를 외우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를 쓰고 외웠지만, 일주일 만에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단어를 쓰면서 외워보고, 드라마에서 본 고시생처럼 암기한 페이지를 찢어서 씹어먹은 날도 있었다. 이후 치른 기말고사에서도 결국 꼴등을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단어를 외웠지만, 문장에 따라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몰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어 교사가 알려준 문장 구조를 활용한 공부법에도 한계가 있었다.
“1학년 내내 영어 공부에 매진했는데도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나는 영어에 소질이 없나’라고 생각했죠.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였고요. 어느 날은 교회 목사님 소개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났는데, 입 밖으로 영어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좌절감이 밀려들었습니다. 영어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싶었죠.”
그럼에도 이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산 지구촌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새로운 전략을 택했다. 일명 ‘앵무새 전략’이었다. 독해는 단어와 숙어만 외우면 어느 정도의 점수를 딸 수 있었지만, 회화 시간에는 입도 뻥긋 못 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회화 실력을 기르고 싶어 앵무새처럼 선생님 말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침에 등교하면 영어회화반의 원어민 선생님을 가장 먼저 찾아갔어요. 선생님이 말하는 문장을 한글로 받아 적고, 종일 입으로 소리 내 익히고 나서 선생님을 찾아가 다시 그대로 말했죠. 나중에는 선생님이 제 영어 공부법을 눈치 채고, 틀린 억양이나 발음을 자세히 교정해 주셨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완벽하게 익힌 문장은 ‘I don’t know’와 ‘Could you explain what it means?’였어요. 이 말을 통해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씨에게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원어민 교사가 1학기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 원어민 교사도 이제 막 영어 공부를 시작한 그가 마음에 걸렸던지, 떠나기 전 그에게 ‘슈렉’ ‘알라딘’ ‘라이언킹’ ‘니모를 찾아서’ 같은 애니메이션 DVD를 선물했다. ‘애니메이션 속 대사를 노트에 받아 적고 매일 연습하라’는 당부도 함께 남겼다. 하지만 기초가 없는 이씨에겐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대사를 무작정 따라 하려고 하니 어려웠고, 시간도 오래 걸려 결국 이 방식으로 영어 공부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
◇5단계 공부법으로 기본기 다져…감상평 쓰고 CNN 기사로 심화 학습도
이씨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해 겨울방학, 이씨는 호주에 있는 자매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 첫날 자기소개 시간에 친구들이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기에, ‘Both Korea’라고 답했어요. 친구들은 제게 몰려들어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제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죠. 저는 북한 사람인 동시에 한국 사람, 즉 ‘한반도인’이었어요. 언젠가 남과 북을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이때 영어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를 표현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나를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당시 홈스테이하던 집주인 부부의 도움을 얻어 자신만의 영어 공부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영상을 통한 영어 공부법의 핵심은 20분마다 끊어서, 5단계 전략으로 공부하는 겁니다. 이때 자신이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영화를 고르는 게 좋습니다. ‘슈렉’이나 ‘겨울왕국’ 등 가족이나 사랑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도움되죠. 먼저, 자막 없이 20분간 보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파악합니다. 다음에는 한글 자막과 함께 시청한 부분을 다시 20분간 보면서 내용을 이해합니다. 이후 다시 자막 없이 보면서 들리지 않거나 모르는 부분을 찾아내며, 듣기와 말하기를 40여분간 연습합니다. 그리고 시청한 부분의 스크립트(대본)를 큰 소리로 읽고 노트에 정리해요. 가령, 120분 분량의 영화라면 1~4단계를 매일 2시간씩 6일간 진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영화 한 편을 통달하고 나서 1~4단계를 무한 반복하면서 영상을 완벽하게 익히는 것이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 같은 5단계 공부법으로 이씨는 3개월 동안 애니메이션 영화 3편을 완벽하게 익혔다. 그는 “3개월 동안 영상으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매일 2시간을 내는 일이었다”면서도 “2시간의 영어 공부를 하루 일과 중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단계 공부법을 실천한 지 4개월 됐을 때쯤, 이씨는 공부법에 변화를 줬다. “심화학습을 위해 1~5단계 공부 전략에 한 단계를 추가했습니다. 5단계 공부법을 실천하고 나서, 영어로 감상평을 썼어요. 저 역시 처음 쓴 감상평은 두 줄에 불과했습니다. ‘This movie is really fun. very interesting.’ 이런 식이었죠. 하지만 이를 네 줄, 열 줄로 조금씩 늘려 나갔습니다. 영어 글쓰기 실력을 향상하려면 ‘매일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해요.”
말하기와 글쓰기뿐 아니라 읽기 공부도 병행했다. 이씨는 “열 번째 영화를 볼 때쯤에는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 미국 언론사 CNN 홈페이지에서 관심 있는 기사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며 “출력한 기사를 왼쪽에 붙이고, 좋은 표현과 모르는 단어를 오른쪽에 정리하는 식으로 열두 번째 영화를 끝낼 때까지 기사 스크랩도 꾸준히 했다”고 덧붙였다.
◇명연설·TED 강연으로 전문적 영어 실력 갖춰
대학(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후 이씨는 영화 대신 명연설과 TED 강연을 활용해 전문적인 영어 실력을 갖췄다. 대학 강의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명연설 ‘Yes, We can!’을 본 것을 계기로, 유튜브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을 모두 찾아보며 공부했다. TED 강연 중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 자신의 전공과 비슷한 정치, 사회과학 분야의 강연을 즐겨봤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과 TED 강연으로 공부할 때에는 1~6단계 공부법을 3단계로 줄였습니다. 먼저, 연설을 자막 없이 보다가 들리지 않거나 모르는 부분만 영어 자막을 확인합니다. 그 뒤, 스크립트를 뽑아 큰 소리로 읽으면서 모르는 표현과 단어를 정리합니다. 이때 그 단어로 최소 두 개 이상의 문장을 만들어 보면 더욱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연설을 하루에 다섯 번씩 5일간 듣는 겁니다. 그리고 6일째 되는 날 연설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식으로 일주일마다 한 영상을 통달했습니다. 만약 TED 강연을 자막 없이 70% 이상 이해할 수 있다면 영상 공부법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글쓰기에 필요한 영어 문법 공부도 대학 입학 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영어 수업의 첫 에세이 평가에서 C+를 받고 나서 문법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았죠. 한국어 번역본에 나오는 어려운 문장 형식과 문법 용어를 피해 영문판 ‘Grammar in Use’ 시리즈 세 권을 두 달 동안 공부했습니다. 이후 학기말에 제출한 에세이는 A+를 받았고, 교수님은 제 에세이를 모범답안으로 공개했습니다. 영어에 자신감이 붙어 곧바로 토플(TOEFL) 시험을 준비했고, 두 달 만에 본 첫 시험에서 103점을 받았어요. 영어 점수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실력이 있으면 점수는 쉽게 올릴 수 있습니다.”
이씨는 학업을 마친 후 남북한을 잇는 소통의 다리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가 이만큼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된 것도 꿈 덕분이다. “통일은 제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남한과 북한이 잘 살 수 있는 길이죠. 국제사회에서 통일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남과 북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통일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습니다.”
17세에 알파벳 처음 본 소년이 美 장학생 된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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