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초등

손녀뻘 선생님이 알려주니 머리에 '쏙쏙' 세대공감이 꽃피는 교실

장지훈 기자

2018.05.13 16:24

해당기사 크게보기 해당기사 작게보기 이메일발송 해당기사 프린트
페이스북 트위터

일성여중고 할머니들의 특별한 과외 수업

서울여중 학생들, 멘토로 나서 매달 두 번 1대1 영어·수학 공부

"제가 '피터'고 할머니가 '제인이에요. 아셨죠? 같이 한 번 읽어볼게요. 해피 버스데이 제인!"

"땡큐 피터. 아이 암 소 해피. 아이고, 맞게 한 건지 모르겠다(웃음)."


기사 이미지
서울여중 3학년 이윤 양이 양내순(71) 할머니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는 모습. “이해력이 좋으셔서 금방 배우신다”는 이 양의 칭찬에 양 할머니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12일 오전 서울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열여섯살 선생님'과 '일흔일곱살 제자'가 영어 교과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멘토 탁지원(서울여중 3학년) 양과 멘티 임기순 할머니는 벌써 한 시간째 영어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임 할머니가 'present'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이놈은 어떻게 읽는 거냐"고 묻자, 탁 양은 "프리젠트, 선물이라는 뜻이에요"라고 답했다. 임 할머니가 "프리젠트는 선물, 프리젠트는 선물"이라고 몇 번이나 반복하자 탁 양은 "할머니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마포구 염리동 언덕배기에 있는 일성여중고는 어릴 적 배움의 기회를 놓친 할머니들이 한데 모여 공부하는 특별한 학교다. 재학생 평균 연령은 61세. 지난 4월부터는 근처 서울여중 학생들이 '멘토'로 나서 할머니들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 한 달에 두 번, 서울여중 학생 20명이 일성여중고 신입생 할머니 20명에게 일대일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준다.



◇주말에도 '열공'하는 할머니들…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오전 10시, 일성여중고 지하 1층 다목적 교실이 20명의 여중생과 20명의 할머니로 꽉 들어찼다. 서로 안부를 묻고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자연스럽게 교과서를 펼쳐 공부를 시작했다.

멘토링에 참여하는 멘티들의 나이대는 '막내' 장미라(56) 할머니부터 '최고참' 진정순(82) 할머니까지 다양했다. 할머니들이 일성여중고의 문을 두드리게 된 사연도 여러 가지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고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한 경우도 있고, 남자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자신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국민(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일을 하러 다녔어요. 평생 '나는 공부하고 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지난해 겨우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어요. 가슴이 벅차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올해 중학생이 됐는데, 손녀 같은 학생들하고 오순도순 책상에 앉아서 공부한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김희자(68) 할머니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김 할머니가 펼쳐보인 연습장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눌러쓴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멘토 황서진(3학년) 양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황 양은 "할머니께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30년 동안 일군 식당도 아들에게 물려줬다고 하셨다. 영어 단어 하나만 가르쳐 드려도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책임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기사 이미지
(위에서 아래로) 진정순(82) 할머니는 “이름 석 자 못 쓰는 게 평생의 한”이라고 말했다. 서울여중 학생들과 일성여중고 할머니들이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조현호 객원기자
◇아름다운 동행, 올해로 4년째

서울여중과 일성여중고가 인연 맺은 것은 2015년의 일이다. "배우려는 열정은 누구보다 크지만, 이해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할머니들을 위해서 어린 학생들이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이선재 일성여중고 교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멘토링이 올해로 4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 교장은 "손녀뻘 되는 학생들에게 ABC를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할머니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수업을 받겠다고 성화"라며 웃었다.

학생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할머니들에게 가르쳐주면서 복습을 할 수 있는 데다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어른에게 자연스럽게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어서다.

홍채민(3학년) 양은 지난해 멘토링에 참여한 친구의 추천으로 올해 할머니들의 멘토가 됐다. "처음에는 손쉽게 봉사활동 시간을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을 실제로 뵙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할머니들의 열정이 정말 대단해요. 하루에도 질문을 100개는 하시는 것 같아요. 이제는 제가 아는 걸 하나라도 더 가르쳐 드려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요."

진지하게 공부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는 학생도 있다. 문지유(2학년) 양은 "제 멘티 할머니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학교에 못 가게 했대요. '여자가 무슨 공부냐'면서 농사일이나 도우라고 하셨대요. '중학교 안에 들어가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하시는데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히는 것 같았어요. 시험 기간만 되면 공부하기 싫어서 짜증 냈던 제 모습이 부끄럽더라고요."

이날 수업은 마칠 시간인 12시를 20분이나 넘겨서야 끝이 났다. 원래는 중간에 10분간 쉬는 시간도 갖기로 돼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 멘티들은 "또 와, 아가" "머리가 늙어서 잘 못 따라가서 미안하다" 등 말을 건네며 고생한 멘토들을 안아줬다.

이윤(2학년) 양은 "선생님이 되는 게 오랜 꿈이었는데, 할머니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목표가 더욱 분명해졌다. 능력이 된다면 할머니가 고등학생이 되셔도 계속 공부를 도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메일발송 해당기사 프린트 페이스북 트위터

목록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