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이공계 교육은 경제 성장 위해 성과만 강조…교육 패러다임 바꿔야”
오선영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8.04.26 11:00

[이공계 교육의 미래를 말하다] ④ 문승현 GIST 총장

  • 문승현 GIST 총장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고 문제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학문 간 경계를 넘는 융합형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임영근 기자
    ▲ 문승현 GIST 총장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고 문제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학문 간 경계를 넘는 융합형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임영근 기자

    2021년 미국에서 로봇 약사가 처음 등장한다. 2022년 도로에는 3D프린터로 제작된 자동차가 달린다. 2024년 3D프린터로 만든 간(肝)을 사람에게 이식한다. 2025년 기업 회계 업무의 30%를 인공지능(AI)이 대신한다. 2026년 미국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10%는 무인(無人)자동차다.

    SF(공상과학) 소설의 한 장면이 아니다. 스위스 다보스에 본부를 둔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 제시한 ‘주요 기술과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전망’의 일부다. 티핑 포인트(급변점)란 어떤 상품이나 아이디어, 기술이 폭발적으로 번지는 순간을 가리킨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면서 전 세계 교육계에선 ‘앞으로 어떤 인재를 길러내야 하느냐’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새로운 역량을 길러줘야 한다는 인식이 국제사회 전반에 자리 잡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변하는 분야는 ‘이공계 교육’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이 지배할 미래에는 이공계 인재가 사회 변화를 이끌 주역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이러한 이공계 인재를 어떻게 길러내야 할까. 조선에듀는 ‘이공계 교육의 미래를 말하다’ 기획 시리즈를 통해 국내 이공계 중심 대학 총장을 만나며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네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문승현(61) 광주과학기술원(GIST) 총장이다.

    ◇“‘구글에 없는 지식’ 만들어낼 인재 길러야”

    ‘미래를 헤쳐 나갈 능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요즘 문승현 총장과 교수를 포함한 GIST 교직원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주제다. 매일 아침 눈뜨면 새로운 기술과 지식이 쏟아지는 지금은 과거와 같은 주입식 교육이 설 자리가 없다. 문 총장은 “컴퓨터·AI가 할 수 있는 것, 검색하면 나오는 지식을 대학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요즘 학계에선 ‘구글이 아는 지식은 더는 지식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르쳐서는 경쟁할 수가 없다는 얘기예요. 앞으로 대학에선 ‘구글에 없는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육이 바뀌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국가·사회·교육자·부모의 인내가 필요해요. 성적으로 학생을 줄세우지 않고, 학문 간 경계를 넘어선 융합 교육과 현장(체험) 중심의 교육을 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기존에 없던 교육을 하려고 하면 당장 여기저기서 반발이 나오곤 합니다. (미래형 인재를 키우려면) 대학의 변화 과정을 수용해줄 포용력과 여유가 있어야 해요.”

    문 총장이 보기에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토론 문화의 부재(不在)’다. 이는 비단 이공계 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후츠파(Chutzpah·형식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질문하고 토론하며 해법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특유의 도전 정신을 뜻하는 말)와 문화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스라엘 대학에선 학생이 교수에게 ‘이건 틀린 게 아니냐’고 바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런 수준의 토론이 우리나라 교육에도 필요해요. 한 사람(교수)이 말하고 그것을 다수(학생)가 받아 적는 식의 교육은 이제 그만둬야죠.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문화가 교육 현장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또 ‘손’으로 경험하는 과학 교육이 확산해야 한다. 그는 “지금처럼 주입식으로 이론을 배우다가 그중 한두 가지만 실험해 보는 식의 교육으론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학생 스스로 문제를 찾고 실험하며 해결책을 찾아내는 식의 체험 중심 교육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광주 지역의 미세먼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나라 환경·상황에서는 어떤 에너지가 최적인가’ 등 일상생활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직접 연구하게 하는 것이죠. 학생들이 교과 공부 외 ‘딴 짓’을 많이 할 수 있게 해야 문제해결력·창의력 등이 자랍니다.”

  • / 임영근 기자
    ▲ / 임영근 기자

    ◇연구자의 창의성·자율성·도전정신의 가치 인정해야

    문 총장은 “기술 발전은 불가피하며, AI의 발달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곧 수많은 업무에서 AI가 사람을 대신하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공부하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을 모두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휴먼스(Humans)’라는 영국 드라마를 보면, 휴머노이드(humanoid·인간과 유사한 형태를 한 로봇)가 엄마를 대신하고 남편을 대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매일 밥을 차려주고 집안일을 대신하는 등 로봇이 엄마의 역할에 도전할 때 엄마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죠. 집안일에서는 엄마가 로봇과 경쟁이 안 돼요. 엄마는 다른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는 AI가 수많은 직군에서 사람을 대신하게 될 시대에 우리 모두가 생각해야 할 문제예요.”

    이런 시대에 필요한 능력의 하나는 AI를 잘 이해하고 이용하는 능력이다. “미래엔 AI를 지배하는 사람과 AI에 지배받는 사람으로 나뉠 겁니다. 더 무서운 일은 더 좋은 AI를 가진 사람(기업)이 부를 축적할 것이라는 점이죠. 예컨대 지금도 주식시장에서 AI가 펀드 매니저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하죠. A증권사와 B증권사가 경쟁할 때 더 우수한 성능의 AI를 보유한 증권사가 부를 축적할 수밖에 없어요. 이공계 교육에서도 이런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 총장은 이러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혁신의 방향과 성패는 융합적 사고를 가진 ‘창의적 연구자’가 좌우할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자들이 ‘만들어진 문제’에 익숙했다면, 미래를 이끌 융합 인재는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는 능력, 인류의 보편적 문제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소프트웨어(SW)부터 AI에 이르는 정보통신기술(ICT) 활용 능력을 갖추고, 한 분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술적 연계성을 치밀하게 설계하는 능력과 정확한 시각을 가진 이공계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한두 차례의 수업이나 단기간의 교육으로는 길러지지 않는다.

    “지난 20여년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어요. 우수한 연구자들이 육성되고 연구 기반도 잘 구축됐죠. 우수한 연구 인력이 산업계에 진출해 기술 개발에 기여했고요. 하지만 최근 이러한 연구의 성과와 평가 시스템이 과학기술이나 산업 현장의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못하고, 규모 확대에만 치우쳤다는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정책이 경제 발전 도구로만 인식돼 단기적인 성과 창출에만 매몰되면서 한계에 부딪힌 것이죠. 그간 연구자가 가진 창의성과 자율성, 도전정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이제는 단기간에 효과를 기대하는 정책에서 벗어나 이공계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할 때입니다. 장기적으로 어떠한 교육을 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사회에 환원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학업 외 다양한 일 도전하며 자유롭게 창의력 발휘할 수 있게 도와”

    GIST는 이런 사회 변화에 따라 학문 간 경계를 넘는 융합형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국내 이공계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를 지향하며, 학생들에게 인문학과 사회과학, 기초과학 등을 두루 익히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음악, 체육, 미술 등 예체능 교과 커리큘럼도 교양 필수 교과로 운영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학생들이 학업 외에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무한도전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학생들이 5명 내외로 그룹을 만들어 1년 간 도전할 과제를 설정하면, 그에 필요한 경비를 학교가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로켓을 만들기도 하고, 별을 관측하기도 하고, 영화를 찍거나 연극하는 그룹도 있죠. 어떤 그룹은 광주 지역 내 고등학교에 가서 새로운 교육법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책상을 원탁으로 배열하고 고교생들을 모둠 지어 앉게 한 뒤 문제를 주고 토론하며 풀게 하더군요. 고교생의 수업 태도가 일방적 강의를 들을 때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변화 모습을 촬영했는데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올해 1학기부터는 기술 창업 중심의 인재 양성 전문 교육 프로그램과 실제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석사 창업 부전공을 설치하기도 했다. 학사 과정 내 지능로봇 부전공과 문화기술 부전공을 확대한 점도 눈에 띄는 변화다. 또한 연구 성과가 사업화나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다. 대표적으로 2013년 시작한 창업 아이디어 경진대회에는 매년 50여명의 학생·연구원이 참여한다. 창업 아이디어 경진대회에 참여한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모의 창업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문 총장은 “모의창업 프로그램 후 실제로 사업 가능성을 확인하고, 법인을 설립해 사업체를 운영하고자 하는 대학(원)생에게는 실전창업 프로그램을 연계해 준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학이 박사급 연구원의 70%를 보유하고 있어요. 즉 대학에 고급 인력이 모여 있다는 얘기죠. 대학에서의 ‘창업’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존·구글 등 20~30년 전 생긴 신생기업이 지금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20여년 뒤 우리 경제를 이끌어 갈 새로운 창업 기업을 지금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학생들이 일자리에만 매달리지 않고, 창업·창직에 나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