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화계 성폭력 논란…교과서에서 작품 사라지나
오푸름 조선에듀 인턴기자
기사입력 2018.02.28 15:03

-교과서 내 성폭력 문화예술인 작품 삭제 10명 중 7명 찬성
-문학계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 분리해서 봐야”…이전 사례와 형평성 논란도

  • 최근 후배 문인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고은 시인.  이를 두고 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조선일보 DB
    ▲ 최근 후배 문인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고은 시인. 이를 두고 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조선일보 DB

    “시는 시인의 마음과 정신이 느껴지는 예술이고, 교과서는 사회적 책임과 도덕을 가르치는 도구입니다.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고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작가를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기억해 주세요”

    “고은 시인과 이윤택 연극 연출가가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문화계에 남긴 업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친일파 논란이 일었던 서정주 시인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쓴 적이 있지만, 뛰어난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시는 그대로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이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최근 ‘미투(Me Too)’ 운동으로 문화계에서 고은 시인과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오태석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 등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연일 제기되면서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들의 작품이 계속해서 수록될지 여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내 청원 게시판에는 고은 시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삭제해달라는 요청이 봇물을 이루고 있지만, 일부 커뮤니티의 누리꾼들은 작가의 도덕성과는 별개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고은 시인의 '머슴 대길이' / 오푸름 기자
    ▲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고은 시인의 '머슴 대길이' / 오푸름 기자
    ◇교육부 “발행사ㆍ저작자 요청 시 작품 삭제 검토”…10명 중 7명 “교과서에서 삭제 원해”

    교육부가 지난 21일 잠정적으로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은 시인의 시와 수필 등은 중ㆍ고교 교과서 11종에 실려 있다. 고교 교과서만 놓고 보면, 6개 출판사가 발행한 문학 교과서에 ‘선제리 아낙네들’ ‘성묘’ ‘순간의 꽃’ ‘어떤 기쁨’ ‘머슴 대길이' 등의 시가 게재됐다. 이 중 '선제리 아낙네들'은 지난 201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된 바 있다. 이 같은 작품이 담긴 교과서를 검토한 교육부는 “중ㆍ고교 국어 교과서는 검정도서로, 수정ㆍ보완 권한이 발행사와 저작자에게 있기 때문에 요청이 있는 경우 검토할 예정”이라며 “교과서 내 작품 삭제 여부는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과 전문적인 판단에 근거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윤택과 오태석 연출가의 작품은 올해 신설된 고교 일반선택 ‘연극’ 과목 교과서의 ‘연극의 이해’ ‘연기’ ‘연극 감상과 비평’ 등에 실려 있다. 그러나 여론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지난 22일 ‘연극’ 과목 교과서 집필진 일동은 이윤택과 오태석 연출가의 작품을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작품은 내년 개정판 교과서에서 빠질 예정이다. 오태석 연출가의 ‘춘풍의 처’는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교육부는 아직까지 입장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여론은 점차 교과서 내 이들의 작품을 삭제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한 언론사가 의뢰해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 23일 전국 성인 90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문화예술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에 찬성하는 여론은 71.1%, 반대로 교과서에 계속 실려야 한다는 의견은 22.5%로 나타났다. 그러나 교육부는 아직까지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7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고은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서 삭제할 생각이 없느냐’라는 의원 질의에 “교과서 발행사와 삭제 여부를 논의하겠다”며 이전과 같은 답변을 되풀이했다.

    ◇  “시와 시인은 분리해서 봐야” vs “교과서 게재는 교육적 측면도 고려해야”

    교육계와 문학계에서는 문학 작품을 작가의 사생활과 분리해 작품성만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이번 논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최현식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근본적으로 시 작품에 시인의 목소리가 100% 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와 시인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한다”면서도 “중ㆍ고교 교과서의 경우, 일반 대중 독자가 아닌 학생이 그 대상이므로 교육적 측면에서 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가치에 대한 판단도 이뤄져야 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작가와 작품의 분리 여부에 관한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 미화 등으로 논란이 된 서정주 시인의 작품은 국정 체제 당시 교과서에서 삭제됐지만, 검정 체제에서 다시 실렸다. 지난 2012년에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작품과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소개하는 글이 교과서에 실려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교육부는 정치인에 대한 공통기준을 만들어 2013년 검ㆍ인정 교과서 심사부터 적용했다. 하지만 교육부가 문화계 성폭력 논란과 관련해서는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의 수정ㆍ보완 권한은 발행사와 저작자에게 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침에 따라 앞선 사례와의 형평성에 대한 논란의 불씨가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