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이는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워낙 깐깐하셔서 히스토리 에세이가 B 나왔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아는 주제라서 자신있게 썼는데 망쳤대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상담시 자주 접하는 상황이다.
에세이만큼 예측하기 힘든 점수가 없다. 수학ㆍ과학처럼 정답이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으니 왜 이 성적을 받았는지 당혹스럽다. 운이 나빴던 것일까, 아니면 아이가 선생님과 스타일이 맞지 않는 것일까?
자녀의 에세이를 직접 읽어봐도 학교 선생님의 코멘트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일일이 한 문장씩 빨간펜으로 고쳐주면 좋겠지만(아무리 잘 쓰는 학생의 글이라도 첨삭이 불필요한 완벽한 문장은 많지 않다), 선생님은 물리적 한계로 인해 마지막 페이지에 종합적인 평가 몇 줄 써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상가상 이를 잘못 받아들여 다음 점수가 더 떨어지는 패닉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답답한 마음에 상담 오시면 일단 학생 에세이를 프린트해서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읽어보면 90% 이상 예상했던 대로다. 솔직하게 가감없이 말씀드리는 것이 경험상 가장 좋다.
“어머님, 수학이나 과학과 달리 쓰기는 주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과정은 쓰기의 기본기에 해당합니다. 기본기에 대한 기준은 선생님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에세이는 우선 주어진 자료를 재구성했을 뿐 개인의 통찰력과 창의력이 잘 발휘되지 않았고, 단어 사용과 문장력이 평이하며, 여러 곳에서 의미가 모호하거나 중요한 문법이 틀렸습니다. B 학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쓰기 일명 라이팅은 복합적인 학문인 동시에 직감적인 예술이다. 가령 칼리지보드가 제시한 SAT 에세이 만점을 받기 위한 조건은 논리력, 독창성, 구성력, 어휘, 문법 등 무려 12가지나 된다. 학문적으로 세분화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선생님도 이를 일일이 따져 에세이를 해부한 뒤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한 번 빠르게 읽고 그간의 경험에 비춰 직감적으로 성적을 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소절 듣고 탈락을 결정하듯 말이다. 실제 SAT 에세이 채점은 평균 2분 이상 걸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평가 항목이 복잡해 평가자마다 편차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경험이 충분한 전문가들이 한 번 읽고 준 점수들은 큰 차이가 없다.
학생 입장에선 일단 학문적으로 차근차근 접근하는 수 밖에 없다. 화려한 변화구를 던지려면 기본 체력 훈련부터 착실히 다져야 한다. 목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음정과 박자에 대한 이론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이팅을 좀 더 단순 명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나는 학생들에게 “자전거 두 바퀴”와 같다고 강조한다. 앞바퀴는 표현력, 뒷바퀴는 사고력이다.
표현력은 단어 선택(word choice), 문장 구조(sentence structure), 문법(grammar), 구성(Organization) 등으로 이뤄진다. 사고력은 배경 지식(background knowledge), 논리(logic), 창의성(creativity) 등으로 이뤄진다.
라이팅 공부의 시작은 표현력이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표현력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어휘력, 문장력, 문법에 대한 이해가 글을 생성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휘력이 중요하다. 읽을 때 이해하는 단어량과 쓸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량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태평양” 대 “하와이”다. 또 서로 잘 호환되지도 않는다. 단어책을 계속 외운다고 라이팅에 써먹기 쉽지 않다. 그냥 뇌의 다른 부분에 저장돼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결국 쓸 때마다 더 좋은 표현이 없는지 사전을 찾아보거나 교정을 받고, 단어 하나를 암기하기 보다는 그 단어가 포함된 좋은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 좋다.
그런데 반드시 명시해야 할 점이 있다. 라이팅의 종착역은 결국 ‘뒷심’ 사고력이다. 우리나라 영어 교육은 표현력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사고력을 등한시하는 기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어휘와 문법 첨삭이 라이팅 수업의 전부인 양 돼 버렸다. 4학년에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히는 것이 그 예다. 위대한 대문호의 작품인데 짧고 평이하다보니 한국 학원의 필독서가 됐다. 하지만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받고 20세기 미국 문학의 결정체가 된 이유를 이 어린 아이들이 이해할 턱이 없다. 절망을 경험해보지 않고서야 불가항적인 자연의 법칙 (the insurmountable force of nature) 아래 무기력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꿈과 희망의 의미를 알 도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을 단어책 외우듯 읽은 것이다. 이런 감상문은 미안하지만 아무 맛 없이 툭툭 부러지는 인스턴트 우동 면발같다.
사고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학교 GPA든 SAT/AP 시험이든 고득점이 불가능하다. 언어와 사고는 동전의 앞뒷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은 통찰력과 감수성이 뒷받침된 학생의 글은 아무리 평범한 단어를 써도 심금을 울린다. 이런 글이 소위 “영혼이 담긴” 글이다. 미국과 영국 선생님, 그리고 입학 사정관이 모두 사랑하는 에세이다.
배경 지식도 쌓여야 하지만 삶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의문을 갖고 한 번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직접 경험하면 가장 좋겠지만 콩나물같이 제한된 환경에서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에겐 독서와 토론이 유일한 해법이다.
“우리 아이는 읽은 책이 없는데요…” 99% 학부모님이 하는 걱정이다. 그러나 이는 자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꼭 오지로 여행을 가고 봉사 활동을 해야 머리가 커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치 감옥같은 생활을 하는 것 같은 부조리한 한국의 교육 환경이야말로 가장 존재론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를 표출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수업을 몇 번 해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깊숙이 내재한 고민의 잔재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표현력과 사고력이 같이 중요함을 알더라도 구체적인 공부 툴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수준에 부합하는 교재는 서점에 전무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영작문 코너를 점령하고 있는 모든 국내 교재들은 일기 쓰기 등 초급이거나 올라가봐야 토플 수준을 넘지 않는다. 고급 라이팅 교재 시장이 작아 채산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원서 라이팅 교재들은 주로 구성(Organization)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한국 학생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문장력(Sentence development)이나 배경 지식(Background knowledge)에 대한 설명이 없어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갈증을 해소하고자 이 포스트에선 표현력의 첫 단추인 단어 선택에서 출발하여 사고력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유학을 준비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고급 라이팅의 핵심 포인트를 하나씩 소개하려 한다.
특히 몰입도와 실전감을 위해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 진학생들이 작성했던 에세이를 기반으로 어떻게 이를 개선시키는 지를 실전 위주로 풀어나갈 예정이다.
라이팅에 고민이 많은 학생 뿐 아니라 학부모도 자녀의 글을 읽고 무엇이 부족한 지 한눈에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
※에듀포스트에 실린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세민의 PERFECT ESSAY] 프롤로그 “우리 아이는 잘 썼다는데 에세이 점수가 왜 낮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