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번 후보 뽑을 거지?”…‘여론조사’식 총학 선거, 기성 정치 ‘판박이’
손현경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7.11.27 17:39

- 네거티브 戰에 학생 피로도↑·출마자 0명인 곳도
- "인맥에 의존한 '조직 선거' 아닌 '공약 선거' 돼야"

  • 학생들이 총학생회 선거 벽보 앞을 지나가고 있다. /조선일보 DB
    ▲ 학생들이 총학생회 선거 벽보 앞을 지나가고 있다. /조선일보 DB

    “이번 총학 선거에 O번 후보 뽑을 거지? 나 그 선배랑 친한 거 알잖아. 잘되면(당선 되면) 한턱 낼게. 도와줘.”

    A 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김태영(가명·서울 동대문구)씨는 매년 단과대학 및 총학생회 선거 시즌이 되면 선거운동원 부탁에 진저리가 날 정도다. 김씨는 그가 뽑으려는 후보가 있었지만, 이 같은 독촉을 받을 때면 난감해지곤 한다. 특히나 선거·개표날이면 영락없이 “너 왜 아직 투표 안 했어? O 후보 안 뽑았어?”라고 전화가 온다. 선거운동원들이 투표소 근처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김씨처럼 투표를 안 한 사람에게 독촉하는 것이다.

    기성 정치 선거운동에서 일삼는 ‘여론조사’식 전화 설문조사가 대학 선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기존 선거에서는 ‘여론조사’식 설문조사 또는 유세에 대해 강력한 규제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설문조사 문항부터 시작해 유권자에게 어떤 응답이 왔는지 구체적으로 선거관리본부에 공개해야 한다”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전 여론조사는 ‘밴드왜건효과’(Band wagon effect)를 일으켜 우세하다고 가늠되는 후보 쪽으로 유권자들의 표가 집중되게 만든다. 이는 공정한 선거를 방해하는 요소로 규제대상에 속한다”고 말했다.

    ◇ 대학 선거서 운동원들이 ‘여론조사’식 전화 유세

    27일 대학가에 따르면 일부 대학 단과대학 및 총학생회장을 뽑는 선거가 정치판 양상을 보임에 따라 대학 선거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싸늘해지고 있다. 후보 선거운동본부가 학생 명단을 만들어 여론조사를 빙자한 전화 유세를 하다 적발돼는 등 기성 정치권 행태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투표율이 개표 기준을 넘지 못하는가 하면 아예 후보조차 내지 못한 학교도 나왔다.

    최근 건국대 서울캠퍼스 사회과학대학 학생회는 최근 ‘여론조사’식 전화 선거 유세를 펼치다 해당 대학 선거관리위원회에 발각됐다. 해당 후보가 선거 직전 유권자 연락처 등을 정리한 명단을 만들고 전화로 지지를 요청하는 등 불법 선거운동으로 징계를 받았다. 선거운동원이 배정된 유권자 10여명에게 전화를 걸어 여론조사 형식의 전화 유세를 한 혐의가 인정됐고, 결국 해당 후보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해당 유세를 접한 한 학생은 “우리 후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뽑을 의향은 있느냐”는 등의 질문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전했다.

    ◇ 각종 네거티브전으로 학생들 피로도 높아

    기성정치권을 닮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각종 ‘네거티브 전략’은 저조한 투표참여로 이어지기도 한다. 양측 공방이 학생들에게 피로감을 줌으로써 투표참여 수준을 전반적으로 낮춘다는 얘기다.

  • 경희대 캠퍼스에 붙은 네거티브 선거 대자보. / 독자 제공
    ▲ 경희대 캠퍼스에 붙은 네거티브 선거 대자보. / 독자 제공
    일례로 명지대 사회과학대학 정후보는 정치후원금 요구 논란으로 사퇴하는 일이 빚어졌다. 지난 20일 페이스북 페이지 ‘명지대 대나무숲 LTE’에는 정후보가 한 학생에게 ‘회장이 되면 자리를 줄 테니 정치후원금 200만원을 달라’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후 SNS에는 수십 개의 반박·재반박 글이 올라오면서 학생 간의 갈등이 깊어졌다. 정후보는 사퇴 이후에도 “대자보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대자보를 올린 사람을 고소했다”고 장문의 해명 글을 올렸지만,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한 재학생은 “관련 글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이제는 읽기도 지친다. 이제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희대 서울캠퍼스는 지난주부터 대자보 네거티브 공방전이 한창이다. 특정 후보 사퇴요구부터 공약 비판, 부정선거 고발, 선관위 회칙오류 지적 등  대자보와 게시글이 올라왔다. 공약의 타당성을 검증하기보다는 후보의 인성을 비난하고 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식이었다. 익명의 학생은 “네거티브가 극에 달했다”며 “정치인들의 악행이 우리 학교 선거에 그대로 세습돼 나타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전했다.

    ◇ 출마자 단 한명도 없는 총학·단과대학 선거 다수

    그 결과 일부 대학은 후보자 미등록 및 투표율 저조로 파행 위기를 겪고 있다. 지난 14일 중앙선거 후보자 등록마감을 공고한 가톨릭대는 총·부총학생회장을 비롯해 각 단과대학생회장, 총동아리연합회장 입후보자가 ‘0명’이었다. 총학생회장 지원자가 없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이처럼 전체 단위에서 출마자가 없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다.

    연세대는 1961년 총학이 발족한 이후 56년 만인 올해 역대 처음으로 ‘총학 없는 1년’을 보냈다. 지난해 11월 치러졌던 2017학년도 총학 선거에는 입후보자가 없어 투표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올해 3월 보궐선거가 열렸으나 투표율은 26.98%로 선거 성립 기준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러나 지난 24일 투표율 50%를 넘겨 간신히 총학선거가 성사됐긴 했지만, 1년 동안 총학이 없던 후유증이 쉽게 가시진 않을 거란 예상이다.
  • 최근 가톨릭대는 중앙 선거 후보로 출마한 학생이 단 한명도 없었다. /독자 제공
    ▲ 최근 가톨릭대는 중앙 선거 후보로 출마한 학생이 단 한명도 없었다. /독자 제공
    남발되는 선심성 공약과 낮은 공약 이행률 역시 결과적으로 대학가에 선거에 대한 사회적 냉소와 무관심을 확산시키는 연결고리가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광재 사무총장은 “총학생회가 내건 일부 공약들은 공약이라기보다 ‘왜(Why), 무엇을(What), 어떻게(How)’가 빠져 있는 아이디어나 슬로건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라며 “믿고 맡겼다가 실망하는 것이 학습 돼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기성정치를 답습할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김재기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시 “기존 정치가 보이는 부정적 양상 처럼 인맥에 기대는 ‘조직 선거’가 대학 선거에서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학생들(유권자)들에게 낮은 정치 효능감을 줄 수 있다”며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정치 선거’가 아닌 유권자를 위한 선거, 공약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