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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릇한 망울이 하나 둘 하얀 꽃잎을 터뜨리던 어느 봄, 이유남(55) 서울 명신초 교장은 매일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여전히 펄떡이는 자기 심장을 원망했다. ‘어쩌면 이렇게 튼튼할까. 제발 좀 멈춰줬으면.’
◇우등생 자녀 둔 ‘수퍼 맘’에게 무슨 일이
지옥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전교 1등을 하던 순둥이 고 3 아들이 4월 자퇴서를 내밀며 “부모 동의란에 도장 안 찍으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했다. 이 교장을 향하는 아들 눈길엔 살기가 등등했다. 등짝을 후리자 “왜 때리느냐”고 달려드는 바람에 집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한 달 뒤엔 한 학년 아래 딸이 아빠 도장을 몰래 찍어 자퇴서를 제출했다. 딸 아이는 엄마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가끔은 분을 못 이겨 온갖 욕을 쏟아내고 자해했다. 아이들은 각자 방에 틀어박혀 먹고 자고 게임 하고 TV 보는 생활을 이어갔다. 컴퓨터를 부수고 인터넷 선을 잘라봤지만 소용없었다. 신경정신과에 데려가려 했더니 “‘당신’이야말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며 난리를 쳤다. 스트레스로 숨을 못 쉬어 쓰러지던 순간 “쇼하고 있네” 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어느 날엔 아들과 딸이 치고받다가 딸 코뼈가 부러졌다. 그 와중에 남편 사업이 부도나 빚쟁이들이 몰려왔다. 이 교장은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고 했다. 10년 전 일이다.
그럴수록 교무실에서 더 활짝 웃으며 아무 일 없는 척했다. 그는 ‘수퍼 맘’이어야 했다. 스무 살 평교사 시절부터 이 교장은 뭐든 열심이었다. 각종 교사 연수 1위를 차지하고 맡은 반마다 평균 성적을 1등으로 끌어올렸으며 집에선 시부모까지 오래 모셨다. 그는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하며 살았다. 그는 “일등 선생이 자기 애는 얼마나 잘 키우는지 보자며 평가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 교장은 아이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자녀 교육을 위해 회식도 마다하고 날마다 칼퇴근을 했다. 그가 현관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숙제 다했어? TV는 얼마나 봤어?” 였다. 유난히 받아쓰기를 못하던 초등 1학년 딸은 밤 11시까지 복습을 해야 했다. “엄마, 너무 졸려요.” “넌 잠이 오니? 세수하고 와!” 가족여행 가는 날은 차 안에서 구구단 암기를 시켰다. 못하면 “넌 누굴 닮아 이 모양이냐”며 닦달했다. 90점 받으면 “100점 못 받았다”고 꾸짖고, 100점 받으면 “만점 받은 애가 몇 명이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늘 주눅 들어 있었다. 초등생 아들은 교통사고로 자동차 바퀴에 5m를 끌려가 다리가 부러졌던 날도 엄마에게 혼날까 봐 “저 안 아파요!”를 외쳤다고 한다. 아이는 입원한 3개월간 쉬지도 못하고 이 교장에게 학습 관리를 받았다. 학생회장 선거 땐 이 교장이 발표문을 대신 써주고 외우도록 했으며, 포스터는 디자인 전문회사에 맡겼다. 학부모총회가 있다 하면 열일 제쳐놓고 달려갔다. 두 자녀는 매 학기 학생회 임원을 꿰차고 공부 잘하며 예체능에도 능한 아이들로 자랐다. “어릴 땐 뭣 모르고 울면서도 엄마가 하라는 대로 따랐죠. 하지만 알게 모르게 가슴에 화가 쌓였던 겁니다. 그게 고등학교 때 폭발한 거죠. 내가 아이들을 괴물로 만든 거예요.”
◇방문이 열릴 때까지
어느 날 이 교장은 창밖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 교문에서 비를 뚫고 뛰어오는 학생이 보였다.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녀석은 비가 와도, 지각을 해도 학교에 오는구나. 우리 애는 집에 있는데…. 아이가 등교하는 일상이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한 일인가.’ “아이가 평범하게 사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까짓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죠. 그때부터 욕심을 다 내려놓기로 했어요.”
이 교장은 “아이에게 각자 재능과 취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 우선이었다”고 했다. “예전엔 아이가 ‘꿈이 없다’고 걱정하면 ‘성적 좋으면 뭐든 될 수 있으니 공부나 하라’고 했습니다. 중 3 아들이 힙합댄스부에 가입했을 때 학교에 쫓아가 독서논술부로 바꿔버렸죠. 그러니 아이가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
고민 끝에 그는 선택권을 자녀들에게 넘기기로 했다. “애 눈치를 살피며 ‘하고 싶은 것 없느냐’고 물으니 ‘그런 거 없어’ 해요. 열불이 나죠. 그럴 땐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아이들은 상대가 나를 비난하지 않을 거라 판단해야 비로소 마음에 있는 말을 하거든요. ‘어른들이 원하는 답이 뭔지 알겠지만, 그건 내 답이 아니다’라고 생각 들면 ‘모른다’고 회피합니다. ‘하고 싶은 게 왜 없어. 그럼 공부나 하지’ 하는 제 속내를 아이가 다 꿰뚫어 본 거죠. 욕심 버리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는 아이가 “하고 싶다”고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수년에 걸쳐 감정코칭 강의를 듣고 역할극을 하며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금기어는 “이건 어때?”였다. 뭐든 제안하는 건 피했다. 아이의 사소한 결정도 존중하고 지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자퇴 1년 반 만에 딸이 제과 제빵 학원을 가고 싶다고 하자 “좋은 생각”이라며 학원비를 건넸다. 제과 제빵 대학에 진학한 뒤 ‘이게 아닌 것 같다’며 두 달 만에 그만둘 때 “살아만 있으면 돼”라고 했다. 수능을 보고 입학한 수도권 대학 사회복지학과를 두 달 만에 자퇴할 때도 “가슴 뛰는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했다. 아들은 학사경고를 받으며 휴학을 거듭하다 뒤늦게 대학을 졸업했다. “화가 끓어올랐죠. 등록금이 얼만데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전 지옥 같던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방 밖으로 나와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라고요.”
◇“살아 있으면 돼”
기다림과 지지를 통해 가족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7~8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사이 아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천천히 찾았다. 아들(28)은 서울의 예술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딸(26)은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청소년 교육 기관에 근무 중이다.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미국에 가고 싶다고 하더니 ‘맨땅에 헤딩’하며 기어코 높은 학점을 받아왔다. 둘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한단다. 최근 이 교장은 딸 도움을 받아 책 ‘엄마 반성문’(덴스토리)를 펴냈다.
이 교장은 아직도 가끔은 욕심이 피어오른다고 했다. “잘 나가는 친구 아이를 보면 ‘우리 애도 그대로 컸으면 저렇게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문예창작학과 간 아들을 신춘문예에 당선시키려면 어느 학원을 보낼까 검색해본 적도 있어요.” 그럴 땐 10년 전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 뻔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아차, 내가 또 왜 이러지. 지금 아이들이 행복하다는데 뭐가 더 필요해?’ 이 교장은 “잠재력을 믿고 기다리면 아이들은 반드시 자기 길을 찾아간다”고 했다. 그는 잠시 후 말을 정정했다. “아니, 자기 길을 찾지 못해도 괜찮아요.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수퍼 맘이 될수록, 아이들은 '괴물'로 변해갔다"
이유남 서울 명신초 교장의 자녀 갈등 극복 이야기
1등 향한 혹독한 교육… 두 자녀 자퇴·갈등으로 … 욕심 버리기 가장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