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흉한 눈빛 ‘시선 강간’이라 부른다는데⋯
신혜민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7.06.28 16:12

-자극적인 단어 자제해야 VS 강한 불만 표출하기 위한 언어적 도구

  • # 대학교 3학년생 최윤진(가명·21)씨는 최근 강의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불편한 시선을 느꼈다. 더워진 날씨 탓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던 최씨의 다리를 뚫어지게 쳐다본 남학생 때문. 그는 “계단을 올라가는 데 느낌이 이상해 뒤돌아보니, 어떤 남학우가 밑에서 제 다리를 힐끔거리고 있더라”며 “시선이 닿아서 보는 것과 민망할 정도로 특정부위만 쳐다보는 시강(시선 강간)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시선 강간'을 당했다는 여대생들이 늘고 있다. 듣기만 해도 불쾌감을 주는 이 신조어는 시선만으로 상대방에게 강간에 준하는 정신적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더워진 날씨 탓에 옷차림이 가벼워지면서 대중교통 안이나 길거리, 캠퍼스 등에서 이런 피해를 겪었다는 여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다. 대학생 주민아(가명·22)씨는 “요즘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위아래로 훑어보거나 특정 부위를 계속해 쳐다보는 아저씨들이 더러 있다”며 “이럴 땐 ‘그만 쳐다보라’고 말하기도 민망해 황급히 다른 칸으로 옮기곤 한다”며 한숨지었다.

    이 같은 논란이 커지자, 대학생들 사이에선 ‘시선 강간’이란 표현에 대한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교 2학년생 김진우(가명·22)씨는 “왜 하필이면 ‘강간’이라는 폭력적인 단어를 사용해 설명하는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이런 단어가 여혐(여성 혐오) 현상을 조장하는 것 같다”고 했다. 대학교 1학년생 강은혜(가명·19)씨 역시 “시선 희롱, 불쾌한 시선 등으로 정의해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데, 굳이 ‘강간’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쓸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과격한 표현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 재학 중인 이하웅(가명·24)씨의 경우, 최근 수업 시작 전 창밖을 바라보다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밖에 서 있던 여학생의 다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는 이유에서다. 이씨는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있는데, 밖에 서 있던 여학우가 강의실로 찾아와 ‘어딜 그리 빤히 쳐다보느냐’며 ‘시선 강간 그만하라’고 쏘아붙였다”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강간’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사과를 요구하니, 마치 엄청난 성범죄를 저지른 것 같아 억울하고 답답했다”고 했다.

    한편에서는 이 같은 단어가 나오게 된 근본적인 문제부터 짚어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학교 3학년생인 오혜린(가명·22)씨는 “시선 희롱이든, 시선 강간이든 여성들이 이런 시선에 불쾌감을 가진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며 “단어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보단, 이 문제가 왜 생겨났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학교 4학년생인 최지석(가명·26)씨는 “그만큼 여성들이 이런 시선에 대해 불쾌하다는 말 아니냐”며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보다, 자극적인 단어 사용하는 것이 ‘앞으로 조심해야겠다’는 강력한 각인 효과를 주는 듯하다”고 했다.

    실제로 이달 초 페이스북 익명 페이지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도 시선 강간에 대한 게시글이 올라와 학생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 학생은 “시선 강간은 한없이 애매한 기준이며 불분명한 개념”이라며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허락 없이 보는 건 괜찮고, 남자가 예쁜 여자를 보는 건 음흉하다고 치부하는 건 너무 이중적인 태도 아니냐”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학생은 “그냥 쳐다보는 걸로 뭐라 하는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거나 특정 부위만 뚫어져라 보는 게 문제”라며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 이 기분을 모를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시각차가 있다. 노정민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 대표는 “쳐다보는 시선만으로 불쾌한 감정을 느껴 이처럼 표현한 당사자들의 입장도 충분히 존중한다”며 “하지만 실제 강간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강간’이란 단어를 이런 상황에 표현한 걸 듣는 그들의 마음은 어떨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반면,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같은 단어 선택은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일종의 ‘언어적 도구’”라고 강조했다.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폭력적인 시선에 대한 불쾌감을 강력히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희롱이라는 단어도 90년대가 낳은 신조어였어요. 이후 끊임없는 문제 제기로 인해 법적 기준이 마련됐죠. ‘시선 강간’ 역시 현재 다소 자극적으로 들릴지라도, 일종의 ‘저항’의 목소리라 생각하고 조금씩 사회적 인식을 바꿔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