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픽업하랴, 학교 활동하랴… ‘새 학기 증후군’ 겪는 할마들
신혜민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7.03.22 14:48

-새 학기 되면 손주 챙기느라 더 바쁜 할마(할머니+엄마)들
-육체적 노동으로 ‘손주병’ 호소하기도
-할마들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돼”

  • 직장 일로 바쁜 딸을 대신해 외손자를 돌보는 김미숙(61·서울 성동구)씨는 최근 들어 부쩍 머리가 지끈거린다. 손자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해 신경 쓸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손자 등하교 준비서부터 학원 픽업, 준비물 챙기기, 저녁 식사까지 도맡는다. 지난주에는 학부모 총회에도 참석했다. 김씨는 “학교에서 알려준 중요 전달사항을 혹여나 잊어버릴까 싶어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두 받아 적었다”며 “매일 알림장도 확인해 딸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

    ◇“3월 새 학기엔 손주 챙기느라 더 바빠요”

    학기 초를 맞아 ‘황혼 육아’하는 '할마(할머니+엄마)'들 사이에서 육체·정신적 질병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새 학기가 되면서 손주를 위해 챙겨야 할 일이 평소보다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는 없었던 숙제관리, 학교 활동 등으로 부담이 더해져 일종의 ‘새 학기 증후군’을 겪는 것이다. 새 학기 증후군(new semester blues)은 신학기에 대한 두려움과 중압감이 스트레스로 작용해 정신 상태와 면역 체계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하지만, 최근에는 아이들을 옆에서 일일이 챙기는 육아담당자인 조부모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에 다니는 두 손녀를 둔 고상옥(65·인천 연수구)씨는 손주들의 신학기가 되면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학교 가기 싫다는 손녀를 달래 등원 준비하랴, 밥 먹이랴, 학원 보내랴 온종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고씨는 손주의 학부모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침 출근 준비로 바쁜 며느리를 대신해 첫째 손주가 다니는 학교에서 녹색어머니회(등·하굣길 교통안전지도 활동)를 하기도 했다. 올해는 둘째까지 학교에 입학해 두 번 참여해야 할지 고민이다. 고씨는 “작년엔 하필 가장 추웠던 12월에 활동해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면서 “지난 2년간 손주와 바쁜 아들 내외를 위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왔지만, 올해는 너무 힘들어서 또 참여해야 하는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달라진 아이 일정을 맞추는 일도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워킹맘인 딸을 대신해 초등학교 1학년 손자와 유치원에 다니는 네 살배기 손녀를 돌보는 장영자(61·서울 양천구)씨는 아이들 스케줄 관리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다고 말한다. 매일 학교와 어린이집을 들락거리다 하루가 다 간다는 것이다. 

    “지난주엔 컴퓨터로 방과후학교 신청하는 법도 배웠어요. 딸이 ‘인기 강좌는 금방 마감된다’며 저도 동참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죠. 어찌나 부담되고 가슴 떨리던지⋯. 결국 전 실패했지만, 딸은 성공했어요. 신청했으니 다행이지만, 만약 못 했다면 그 원망이 모두 저에게 돌아올까 싶어 걱정됐어요.”

    ◇“학년 올라갈수록 챙길 것 많아”… ‘손주병’ 호소하기도

    육아를 전담하는 조부모가 새 학기에 더욱 힘들어하는 이유는 매년 챙겨야 할 것이 바뀌고 다양해져서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외손자를 키우는 한성희(65·경기 군포)씨는 모바일 알림장 애플리케이션(앱)을 내려받고 확인하는 과정을 배우는 데만 1달이 넘게 걸렸다고 털어놓는다.

    "요즘은 숙제나 준비물 등을 따로 프린트해서 주지 않고 모바일 알림장 앱을 통해 알려줘요.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도 익숙하지 않은 제가 시간을 들여 체계를 익혀야 했죠. 저희 아이가 학교에 다녔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공부해야 할 일 투성이네요."

    덧붙여 딸에 대한 서운함도 드러냈다. 한씨는 “낮에 시간 내기 힘든 아이 엄마를 대신해 각종 서류와 신청서를 제출하기도 한다”며 “가끔 부탁한 일을 잊거나 실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마다 큰 한숨짓는 딸을 보면 미안하면서도 괘씸할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고령으로 인해 육체적 활동에 대한 고단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손자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흔히 겪는 건강 문제를 통틀어 ‘손주병’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다. 손목에 생기는 건초염과 터널 증후군, 어깨 회전근개 파열과 오십견, 척추의 추간판 탈출증 등이 대표적이다.

    홍혜숙(66·서울 강남)씨는 매일 15분 거리인 손자의 등하굣길을 함께 하고 있다. 홍씨는 “우리 아이가 다녔을 때와는 달리, 요즘은 세상이 흉흉해져 학교 가는 길도 혼자 보낼 수가 없다”며 “지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 부산하게 움직이다 보니 몸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큰 힘이 돼요”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도 조부모가 육아를 지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느리 혹은 딸이 한번 전업주부가 되면, 다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현실을 잘 아는 것이다. 워킹맘인 딸을 대신해 7년째 손주를 돌보는 한 할머니는 “애지중지 교육하고 키운 딸이 육아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는 게 아쉬워 육아전선에 다시 뛰어들었다”면서 “손자 보는 일이 피곤하고 힘들긴 하지만, 내 자식 위한 일이라는데 마다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조부모들은 자식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지만, 당연시 생각하진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초등학교 1학년과 두 살배기 손주를 키우는 한 할머니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식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아이를 봐주는 건 아니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에 보람을 느낀다"며 “할머니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단, 고생하며 손주를 돌보는 우리의 입장도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