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정행위 안 하겠습니다" 명예서약도 강요하는 세상
신혜민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7.02.24 15:49
  • "서울대 자연과학대 구성원은 학문의 정직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정직성을 훼손하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진실하게 지적탐구에 매진한다."

    단체의 명예를 위해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준칙인 ‘아너코드(Honor Code·명예서약)’가 국내 대학가에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정행위 등 학내 문제에 대해 처벌의 두려움보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부정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돕고자 대학들이 앞장서서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은 올해 1학기부터 아너코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지난 학기 잇단 커닝(cunning) 파문으로 홍역을 치른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은 15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에서 1학년생 200여 명을 대상으로 아너코드를 적용했다. 앞으로 매년 신입생들에게 서약을 받아 3~4년 후 전체 재학생이 서약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운 것이다. 또 이와 연계해 오는 새 학기부터 교수들의 재량에 따라 일부 시험을 ‘무감독’으로 치르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김성근 자연과학대학 학장은 “아너코드는 학생 스스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느끼게 하려는 문화운동”이라며 “자연대는 학문 특성상 더욱 엄정한 연구윤리를 요구받기 때문에 학부 때부터 이를 훈련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는 24일 교내 노천극장에서 열리는 신입생 입학식에서 아너코드를 처음 선보였다. 연세대 아너코드에는 ▲나는 성실하고 정직한 자세로 대학생활과 학문활동에 참여한다 ▲나는 대학공동체 구성원을 배려하고 존중한다 ▲나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성평등의 가치를 지향한다 등의 내용을 담았다. 김용학 연세대 총장은 “연세대 아너코드는 연세의 얼을 담은 연세인이 되겠다는 약속이자,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로 성장하겠다는 선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고려대학교의 경우에도 학생들이 무감독 시험을 치를 때 답안지에 비슷한 형태의 양심선언을 작성하도록 하고 있다. 고려대 시험 답안지를 살펴보면, 오른쪽 상단에 ‘나는 내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시험을 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쓰고 서명하게 돼 있다.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을 볼 때 지극히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서명으로 약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학의 아너코드 도입을 놓고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양심선언을 강요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는다. 서울대 입학을 앞둔 A(19)군은 "아너코드가 최근 연달아 일어나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한 대학 내 자구책이라지만, 양심선언이 자발적으로 이뤄져야지 학교가 나서 이를 독려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선언을 신입생 때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고 전했다.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B(22)씨는 “누구든 정직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원칙만 고수하며 경쟁하면 나만 망하는 게 현실”이라며 “이런 잘못된 사회부터 뜯어고치는 것이 우선시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부 전문가들도 아너코드의 효과와 효율성에 의구심을 표하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중기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너코드를 도입하기 전에 부정행위, 표절 등 학내 문제들이 왜 일어나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며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너코드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에 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노 교수는 10년, 20년 전과는 달리 요즘 대학생들의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도 말했다. 예컨대, 학기 말 성적발표가 나오면 A0를 받은 학생이 A+를 받지 못했다며 항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우리 사회가 점점 학생들을 학점과 취업의 경쟁 속으로 몰아 이런 학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풀어가야 이런 행태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아너코드는 1840년 미국 버지니아대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어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 등이 채택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 대학 학생들은 학기 초부터 감독관 없이 시험을 치르고 아너코드를 어기지 않겠다는 서명을 한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엔 해당 대학의 규율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국내에서는 그간 사관학교와 한동대 정도만 아너코드를 운영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