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내 ‘신분 전쟁’, “‘분캠충’이라고 단톡방 초대 안 해줘요”
손현경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7.02.21 09:03

-조려대·원세대·학과 카스트제… 학교 내 서열주의 ‘민낯’
-전문가 “보상심리 작용, 정부부터 대학 줄 세우기 고쳐야”

  • 조선일보 DB
    ▲ 조선일보 DB
    고려대 세종캠퍼스(세종시 조치원읍 소재)를 합격한 박서럽(가명·19)씨는 여느 새내기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테이션(OT)을 가기 전 친구를 미리 사귀어 두기 위해 ‘고려대 신입생 카카오톡 단체방’을 SNS로 찾고 있었다. 특히나 박씨는 SKY 중 고려대에 합격했다는 마음에 더욱더 마음이 달뜬 상태였다. 그러나 박씨는 고려대 새내기 단톡방을 들어갈 수 없었다. 분교 캠퍼스 방은 따로 있었던 것. 심지어 이런 사정을 그의 친구에게 말했더니 “고려대 조치원은 이름만 고려대지 ‘조려대(고려대 세종캠퍼스를 비하해서 부르는 말)라고 불리잖아”라며 오히려 비수를 꽂았다.

    경기도 이천에 거주하는 이은실(가명·18)씨는 다음 주면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이씨는 등록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이천 시내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이씨는 이곳에서 ‘머리가 좋은 직원’으로 불린다. 이유인즉, 대학 이야기가 나와서 연세대를 붙었다고 말하니 매니저가 ‘이천의 명물’이라고 치켜세운 것. 이씨는 떳떳하지는 않지만, 원주캠퍼스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새 학기 전, 모바일 메신저로 본교 캠퍼스 합격인증 ‘바람’

    대학 신입생들 사이의 서열 전쟁 시즌이 돌아왔다. 새 학기에 앞서 이들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바탕 ‘키보드 배틀’을 치른다. “대학 합격증 페메(페이스북 메시지)로 안 보여주면 (중앙대) 안성캠 애들이 끼려고 그래요. 합격증 인증은 필수.”, “합격증 없으면 무조건 강퇴.”, “분캠충은 따로 톡 방 있으니 거기로 가시오.” 이들은 이전보다 한층 더 자신들의 신분 확보(?)에 민감한 태도를 보이며 상대방의 캠퍼스를 비하하거나 자신의 입학전형에 우월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때문에 엄연히 고려대 학생임에도 ‘조려대’라 비난받았던 박씨처럼 본교생이 아닌 분교생들은 각 대학에 새내기들이 모여 있는 모바일 메신저 채팅방에 초대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분교’는 원래 고등교육법상 특정 학교의 설립·경영자가 교육부장관의 인가를 받고 설치하는 캠퍼스다. 즉, 지역이 따로 떨어진 분리된 형제 대학이지 다른 학교는 아닌 셈이다. ‘분교충’은 분교 출신 학생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지역 캠퍼스에 ‘벌레 충’(蟲)자를 붙여 만든 말이다.

    ◇신입생부터 인문대는 ‘실업자’ 낙인… 취업 안 되는 학과로 ‘비난’

    이들의 학내 ‘신분제 설전’은 본ㆍ분교로 시작해 학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문학과 신입생들은 벌써 실업자로 낙인찍힌다. “철학과 17학번 이래 ㅋㅋㅋ. 나 같으면 OT 안 가고 토익스피킹 준비할 듯.” “솔직히 상경(대학) 중에서는 경영학과가 갑 오브 갑 아니냐. 그다음이 경제학과인 듯. 애인 사귀려면 둘 중에 하나는 잡아야지.” “공대가 최고지. 정보보호학과, 컴퓨터공학 남자친구 있으면 좋겠다.” 수능 등급을 매기듯 서열 매기기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대학 내 서열주의는 서울대서 2005년 지역균형전형과 2009년 기회균등전형을 도입할 때부터 본격화됐다. ‘교육의 기회균등’을 위해 만들어진 이 제도가 일부 일반전형 출신 학생들에게 왜곡된 시선을 낳아 “기균충, 지균충은 입학 성적이 낮아 수업 진도를 따라오지 못한다”며 “능력도 안 되는 애들이 (서울대에) 들어와서 피해를 준다”고 주장했다. 이때 ‘기균충’은 기회균등선발전형으로 뽑힌 저소득학생을, ‘지균충’은 지역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한 지방 고교장 추천 학생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해 서울대는 지난해 9월 기회균등, 지역균형전형 등으로 선발된 학생들의 학업과 정서·복지 관련 지원 등을 담당할 TF팀을 만들기도 했다.

    ◇전문가 “우리 사회 ‘줄 세우기’ 문화부터 고쳐야”

    그러나 대학 내 신분제에 상처를 입은 학생을 위한 TF 구성이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윤창규 연세대 원주캠퍼스 미래전략부 부장은 “선의(善意)로 사회적 여론의 공감대가 형성돼서 프로그램이 진행되면 좋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존심 강한 학생들에게 반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며 “대학의 TF 구성 등과 같은 관심이 학생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광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치열한 경쟁사회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경구 서울대 자율전공학부장은 “‘분캠충’ ‘지균충’ ‘기균충’ 등의 단어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서 생겨난 단어”라고 풀이했다. 그는 “기회균등전형이나 지역균형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당당히 과정을 밟고 합격했으나 이들이 마치 부정한 방법으로 대학에 들어온 것처럼 왜곡돼 있다”며 “대학이 이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고 선발한 것이지, 이들에게 연민을 베푸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중기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현상은 더 많은 성과를 낸 아이들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업적주의’ 문화 탓이 크다”며 “무엇보다 정부부터 대학을 일렬로 줄 세우지 말아야 학생들 간 서열 경쟁도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