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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 스마트폰만 하는 걸까? “…… 불안하니까.” 답은 그것이다.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당신에게는 불안이 깃들어 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심심해서 그런다, 꼭 연락할 일이 있어 그러는 거라고 반박하겠지만,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볼 때, 스마트폰이 침입한 일상이 기이할 정도로 견고하다면 그것은 상당 부분 자기 안에 잠재한 불안 탓이다.
그것이 불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법이 있다. 테스트는 간단하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 하루를 지내보라. 초조, 걱정, 불안을 느낀다면 당신이 스마트폰을 써온 이유는 불안이다.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면, 지하철 안 사람들은 저마다 유리벽을 짜고, 스마트폰 스크린에 시선을 모은 채 자기만의 방에 들어앉아 무언가에 골몰해있다.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말을 건네기 위해 의도된 고립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의도된 고립은 우리를 더 고독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렇게 스마트폰에 빠진 것일까? 우리가 스마트폰을 하는 주된 이유는 관계욕구와 불안 때문이다. 외로운 ‘나’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가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고, 자신을 필요로 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액정화면을 쉬이 꺼두지 못한다.
혼자인 것이 두려워,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친근한 그 사람의 그림자가 액정화면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바빠 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린을 터치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의 답이 화면에서 사라지면 내 존재도 꺼져버리는 듯한 고독과 불안을 마주하는 것이다.
좀 더 심리적인 배후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의 일부
한국인은 타인의 평가와 시선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정도가 심하다. ‘너’가 ‘나’에 대해 뭐라 말해주어야 나는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우리에겐 독립적인 자아보다 상호의존적 자아가 더 중요하다. 상호의존적 자아란 타인과 상호작용을 유지하면서 그 관계에 의지해 자기존재를 확인하는 자아이다. 그리고 상호의존적 자아상이 강한 사람은 사람들이나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안도 역시 높고, 관계지향적 일을 하려는 욕구 역시 강하다. 나를 확인하기 위해, 불안을 잊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스마트폰을 터치한다.
터치가 오직 희망인 것이다. 마르틴 부버는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성찰한 철학자이다. 그는 우리는 나와 사물이 아닌, 나와 너로써 관계를 맺고 있으며 나와 너의 관계가 진실해지기 위해서는 ‘만남’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실한 만남만이 관계의 실체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매일 서로를 만나지만, 그것은 어쩌면 진실한 만남이 아닐는지 모른다. 대개 문자의 나열일 뿐, 상대의 실감은 사라진 껍데기이다.
그것은 다만 나와 스마트폰이 대면하는, 나와 사물의 접촉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나와 너가 전면적인 만남을 갖는 것이 아니기 쉽다. 스마트폰으로 맞이하는 만남은 그의 체취도, 억양도, 표정도, 몸짓도 사라진, 단지 문자와 기호의 나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끊임없이 그/그녀와 만나면서도 만남의 기쁨을 만끽하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그 만남이 진실한 만남이 되기에 너무 많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마트폰으로 서로와 서로를 이어보려는 시도는 단지 서로가 이어져 있다는 표식일 뿐, 기쁨을 뒤로 미루거나 외면하는 거짓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에 식사 한 번 해요.(기약 없지만)” 그/그녀와의 이 만남이 거짓일까 봐 우리는 또 불안한 것이다. 그것이 거짓처럼 느껴지기에 우리가 이토록 불안했던 것이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불안에서 끊임없이 도망칠 수 있게 해주는 혁신적인 도구임에 틀림없다. 스마트폰이 끊임없이 그/그녀를 내게로 불러 세운다. 그/그녀의 메시지가 내 스마트폰으로 계속 떠오르는 동안 나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무의미한 반복적인 소통은 피로나 허무주의를 가져다줄 것이다. 누구라도 무의미한 말의 주고받음에 지쳐본 적 있을 것이다. 진심이 사라진, 부질없는 소통이 계속되면 소통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빠질 위험도 있다. 그것이 심해지면 인간관계 자체가 허무한 것이라는 비관론에 젖을 수 있다. 우울증은 그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하는 불청객인 것이다.
박민근독서치료연구소 소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스마트폰에 중독된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