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내 손으로 공공정책 만들기'에 나서다
맛있는교육
김구용 조선에듀케이션 기자 kky902@chosun.com
기사입력 2012.11.06 11:38

'제4회 청소년 사회참여 발표대회' 참가 2개교 사례 살펴보니

-교통, 식품안전 관련 '정책 입안' 도전
-"제안 과정에서 시민의식과 보람 배워"

  • 지난달 20일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4회 청소년 사회참여 발표대회’가 열렸다. 올 4월부터 5개월간 전국 110개 중고생 666명이 직접 파악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공정책 제안서를 보고서 형태로 제출했고, 원고 심사를 거쳐 선발된 12개 팀이 이날 참가했다.

    경남 창원 대산고등학교 지역정책연구 동아리 '유토피아'는 학생들의 불편에서 시작된 교통문제 사례를 지역 사회 문제로 확대, 교통 정책으로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서울 상일여고 시사 동아리 '가온누리'는 학교 앞 '그린푸드존(Green Food Zone)' 제도의 허점을 자세히 조사해 대안을 제시했다. 조선에듀케이션은 두 동아리 대표를 전화로 만나 이들의 구체적 활동 내역을 들었다.
  • 경남 창원 대산고 유토피아 회원들이 지역 주민을 상대로 버스 노선의 불편과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제공 대산고>
    ▲ 경남 창원 대산고 유토피아 회원들이 지역 주민을 상대로 버스 노선의 불편과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제공 대산고>

    ◇경남 창원 대산고 '유토피아'│불합리한 교통 정책에 '메스' 대다

    허준(경남 창원 대산고 1년)군은 기숙사 생활 규정 위반에 따른 벌점 초과로 ‘1주간 기숙사 퇴소’ 처분을 받았다. 별 수 없이 1주간 집에서 통학하게 된 허군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의 집은 경남 김해시 진영읍인데 학교는 창원시 대산면에 위치해 있기 때문. 자가용으로는 5분 남짓한 거리지만 행정구역 상 차이로 진영읍과 대산면을 연결하는 시내버스 노선이 없는 데다,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등교하면 1시간 넘게 걸렸다. 택시를 타더라도 시외요금이 추가돼 매일 7000원씩 내고 등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비단 허군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대산고 재학생 중 절반 이상이 진영읍 거주자인데, 기숙사가 부족해 대부분 통학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허군은 자신이 속한 지역정책 연구동아리 '유토피아'에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건의했다.

    그런데 막상 상황 파악에 나선 동아리 부원들은 설문조사 도중 깜짝 놀랐다. "진영읍 주민의 대부분은 노인층이에요. 이분들은 김해시에 있는 병원에 가기 위해 주로 버스를 이용하는데, 왕복 시간이 서너 시간씩 걸리는 바람에 상당히 애를 먹고 계셨죠. 사실상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상황에 놓인 분도 많았습니다." (윤성민양, 경남 창원 대산고 2년, 유토피아 부장)
  • 유토피아 부원들이 대산고 재학생을 대상으로 'C&C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다. <사진 제공 대산고>
    ▲ 유토피아 부원들이 대산고 재학생을 대상으로 'C&C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다. <사진 제공 대산고>

    설문조사를 통해 버스노선 문제가 지역 전체의 문제란 사실을 인식한 부원들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먼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 중인 정책을 검토했다. 그 결과 △DRT(Demand Responsive Transportation, 수요 응답형 여객자동차 운송사업) 정책 △농어촌 버스 재정 보조금 제도 △지역 간 완행 시외버스 운행 등 지자체에서 시행 (준비) 중인 정책이 있긴 하지만 지역 주민의 불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엔 미진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토피아 회원들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도시(city)와 농촌(country)을 연결한다는 뜻에서 일명 'C&C 정책'을 만들었다. 평일엔 통학 시간과 출퇴근 시간의 배차 간격을 좁혀 운영하고, 주말엔 농촌에 도시 학생과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농촌을 찾는 버스 방문객을 늘린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회원들은 완성된 정책안을 창원시청에 제출했지만 "행정구역이 달라 창원시에선 해결할 수 없으니 김해시청에 문의하라"는 답을 들었다. 김해시청에 다시 전화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상급기관에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윤양은 "국가에서 발 벗고 나서주길 바랐는데 해당 관청에선 서로 미루기 바쁘더라"며 아쉬워했다. "조만간 도지사 선거가 있거든요. 각 후보 진영에 보고서를 제출, 건의할 생각이에요. 선거권은 없지만 우리도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목소리를 내야죠."

  • 가온누리 회원들이 학교 주변 '그린푸드존'을 점검한 결과, 관련 법규를 지키는 업소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업소는 그린푸드존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현수막으로 가려놓은 채 영업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 상일여고>
    ▲ 가온누리 회원들이 학교 주변 '그린푸드존'을 점검한 결과, 관련 법규를 지키는 업소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업소는 그린푸드존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현수막으로 가려놓은 채 영업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 상일여고>

    ◇서울 상일여고 '가온누리'│학교 앞 식품 안전, 우리 손으로

    "올 1학기 초,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에서 학교 근처 가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저희 단골 가게가 식품위생 기준 위반 업소로 밝혀졌어요. 우리가 자주 먹는 식품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접하곤 자연스레 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죠.”
    '가온누리' 대표를 맡고 있는 김소진(서울 상일여고 2년)양과 가온누리 회원들은 학교 앞 '그린푸드존' 정책의 문제점에 눈을 떴다. 그린푸드존 팻말이 버젓이 붙어 있는데도 위생 상태가 엉망인 곳이 적지않았던 것. 부원들은 학생 대상 설문조사와 학교 인근 업소 현장 조사를 통해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그 대안으로 일명 '푸드레인저(Food Ranger)' 정책을 제안했다.

    푸드레인저 정책은 각 학교에 '식품안전 동아리'를 만들고 보건소 담당자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직접 그린푸드존 내 영업장에 대한 정기 점검을 시행하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학교 앞 '안전 먹을거리'를 본인 손으로 챙길 수 있고, 학교생활기록부에 자신의 활동 내용을 기재할 수도 있다. 영업장은 학생들의 인증을 통해 '안전 업소'란 인증을 받아 자체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사실 학생들의 영업소 점검 활동은 현행법 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의 정책을 그대로 제안할 순 없었다. 그래서 찾은 대안은 '자문 구하기'였다. "원안이 나온 후 강동구보건소 보건위생과 식품안전팀을 찾아 조언을 구한 후 저희가 만든 원안을 보완했어요. 그 다음엔 식약청 산하 보건환경연구소 실무자분들께 저희 활동을 소개하고 법률적 부분에 대해 조언을 받았습니다."(김소진)

    이후 가온누리 회원들은 정책 검토를 위해 조례 제정 권한을 지닌 박찬호 강동구 의원을 만나 자신들의 정책안을 설명했다. 이에 박 의원은 "공적 권한 부분만 시정된다면 실현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는 긍정적 답변을 내놓았다.

    가온누리의 활약에 힘입어 상일여고엔 조만간 식품안전 동아리가 창설될 예정이다. 가온누리 회원들은 내년 한 해 교내 식품안전 동아리를 시범 운영한 후,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푸드레인저 정책을 보완해 민원을 다시 제기할 계획이다.

  • 경남 창원 대산고 지역정책동아리 '유토피아' 회원들. <사진 제공 대산고>
    ▲ 경남 창원 대산고 지역정책동아리 '유토피아' 회원들. <사진 제공 대산고>

    유토피아와 가온누리가 펼친 활동은 둘 다 5개월 이상 진행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5개월이면 학업에 충분히 지장을 줄 수 있는 기간. 이에 대해 두 학생은 "사실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배운 게 더 많다"고 강조했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뭐 그런 데까지 힘을 쏟느냐'는 어른도 많았어요. 하지만 C&C 정책은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어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가 먼저 바꿔보자는 생각에 시작했습니다. 아직 구체적 해결책은 안 나왔지만 문제를 찾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습니다."(윤성민)

    "이번 대회를 준비하며 식품안전에 대해 전문가 수준으로 깊게 파고 들 수 있었어요. 관련 법규도 수없이 뒤졌죠. 상황이 바로 변하진 않았지만 저희 활동이 사회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람도 느꼈고요. 우리 같은 고교생도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김소진)
  • 서울 상일여고 시사동아리 '가온누리' 회원들. <사진 제공 상일여고>
    ▲ 서울 상일여고 시사동아리 '가온누리' 회원들. <사진 제공 상일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