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배 작가의 서울 이야기] 청계천 다리밟기(하)
신현배
기사입력 2010.03.14 00:18

"과거 급제할 때까지 믿고 기다려주오"
신방 잘못 찾은 선비, 신부에게 평생을 약속하는데…

  • “제가 남의 신방에서 하룻밤을 보냈군요. 죄송해서 어쩌죠?”

    그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안눌은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그때 신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신랑이 아닌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했으니 저는 이제 죽어야 할 몸입니다. 하지만 저는 늙은 부모님의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부모님은 누가 모시겠습니까? 당신과 저는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를 첩으로 거두어 주신다면 당신을 지아비로 섬기며 늙은 부모님을 모시겠습니다.”



  • 삽화=양동석
    ▲ 삽화=양동석
    이안눌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습니다.

    “저는 엄한 부모님 밑에 자라 이제 겨우 장가든 몸입니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가지 못한 처지에 첩을 얻기에는 좀.”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이모님이 계신다면 저를 그 댁에서 지내게 해 주십시오. 그 대신 당신 집안이나 우리 집안에는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우리끼리도 절대 만나지 말고요. 그랬다가 과거에 급제하시면 양가 집안에 알려 같이 사는 게 어떨까요?”

    이안눌은 신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그 집에서 나와 함께 자신의 이모 댁으로 갔습니다. 그 뒤 신부는 이모의 집안일을 도우며 친딸처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한편, 신부 집에서는 하인들이 엉뚱한 신랑을 신방에 데려다 놓아 신부가 그 사람과 달아난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가는 집안 망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간밤에 병으로 갑자기 죽은 것으로 꾸며 가짜 장례를 치렀습니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이안눌은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 간신히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신부를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이번에는 신부 집에 알릴 차례입니다. 신부가 이안눌에게 붉은 비단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이 비단을 저의 부모님에게 보여 주십시오. 역관이셨던 저의 할아버지가 중국 북경에 가셔서 황제에게 받으신 귀한 비단입니다. 이것을 보이시면 당신 말을 믿으실 것입니다.”

    이안눌이 붉은 비단을 들고 신부 집을 찾아가자, 집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10여 년 동안 소식이 끊겨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신부의 집안은 역관을 하면서 무역을 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은 부자 가문이었습니다. 장인이 돈을 쓰며 뒤를 봐준 덕에, 이안눌은 점점 벼슬이 올라 예조 판서까지 지냈습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수표교 다리밟기를 한 뒤 기이한 인연을 맺은 그는, 자신을 하늘처럼 섬기는 첩 덕에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액막이로 유명한 '수표교 다리밟기'
    태조가 서울을 조선의 도읍지로 정한 뒤, 세종 때까지 서울에 세워진 다리는 모두 86개였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며 쓸모 있게 만들어진 다리가 청계천에 세운 수표교였다.

    처음에는 근방에 마전(말 시장)이 있다고 ‘마전교’라 불리다가, 1441년 청계천의 물 높이를 측정하여 홍수의 피해를 막으려고 다리의 돌기둥에 수표를 설치하면서부터 ‘수표교’라 불리었다.

    수표교는 광교와 함께 정월 대보름날 밤 다리밟기를 할 때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다리를 밟으면 일 년 동안 다릿병을 앓지 않고, 열두 다리를 건너면 열두 달 동안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리밟기를 했다.

  • 현재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곳으로 옮겼다.
    ▲ 현재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곳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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