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배 작가의 서울 이야기] 의좋은 채씨 형제 동네 돈의동(하)
신현배 작가
소년조선일보·현문미디어 공동기획
기사입력 2009.12.03 09:50

"흑흑… 감사님, 저의 사촌형이 돼 주십시오"

  • 채제민은 옷을 새로 지어 입는다, 음식을 마련한다 하면서 감사를 만나러 가는 것을 미적미적 미루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채제민은 집을 나서 관아로 향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냥 찾아가면 감사는 나를 만나 주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꾀를 써야겠다.’

    채제민은 관아에 도착하자 갑자기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목 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관원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관아에 와서 왜 통곡을 하는 거요?”

    “당신들한테는 말 못합니다. 감사님을 직접 뵙고 사연을 털어놓겠습니다.”

    채제민은 대문 앞에서 몇 시간을 통곡한 끝에 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온 누구기에 통곡을 하였느냐?”

    “예, 저는 서울에서 온 채제민이라고 합니다.”

    “채제민이라…. 나하고 성과 항렬이 같구나.”

  • 감사가 이렇게 말하자 채제민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감사님, 제가 감사님과 성과 항렬이 같아서 장인께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감사님이 제 사촌 형님이시라고요. 이 죄인을 죽여 주십시오.”

    사연을 들은 감사는 채제민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큰 죄라고 죽여 달라는 거냐. 내가 네 사촌 형님이 되면 해결될 일을…. 나는 객지에서 동생이 하나 생겨서 좋고, 너는 형님을 얻어서 좋은 일 아니냐.”

    감사는 채제민을 안방으로 데려갔습니다.

    “부인, 내 사촌 동생 제민이오. 인사하시오. 얘들아, 너희의 숙부님이다. 인사드려라.”

    그리고는 채제민에게 말했습니다.

    “제민아, 장인어른을 모셔 오너라.”

    채제민이 장인을 모시고 관아를 찾아가자, 감사는 버선발로 뛰쳐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사돈어른, 어서 오십시오. 이 아이가 오래전에 집을 나가 생사를 몰라 걱정했는데 이렇게 사돈어른께서 사위로 삼아 돌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는 채제민의 장인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체제민은 덕분에 평양에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채제민은 채제공이 감사의 임무를 끝내고 서울로 발령받아 갈 때 그를 따라 서울로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돈의동에 위채 아래채를 짓고는, 위채는 채제공이 쓰고 자기는 아래채에서 살았습니다. 채제공과 채제민은 얼마나 의리가 두텁고 친하게 지냈는지, 사람들은 두 사람이 사는 마을을 ‘돈의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끝〉


    아들이 없어 사위와 함께 사는 '데릴사위' 풍속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사위를 딸과 함께 집에 데리고 사는 데릴사위 풍속이 있었다. 아들이 없이 딸만 둔 부모가 딸을 시집으로 보내지 않고 데릴사위를 들여 같이 사는 것이다.

  • 삽화=양동석
    ▲ 삽화=양동석
    데릴사위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솔서’로, 다른 성씨의 남자를 사위로 맞이하여 집안일을 돌보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예서’다. 가난한 집안의 남자아이를 불러들여 데리고 살다가, 성장하면 딸과 결혼시키는 방식이다. 셋째는 ‘서양자’다. 딸만 가진 부모가 사위 양자를 들여 집안의 대를 잇는 방식이다. 고려 시대까지 행해지던 풍속이다. 넷째는 ‘서류부가’다. 혼례를 올린 사위가 일정 기간 처가에 머물러 살다가 본가로 돌아와 사는 방식이다. 다섯째는 ‘췌서’로, 신부를 얻는 대가로 패물 대신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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