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논술] 머리카락 하나까지 극도의 사실성 강조한 초상화 '어진'
최혜원 블루로터스 아트디렉터·'미술 쟁점-그림으로 비춰보는 우리시대'저자
기사입력 2010.02.25 03:09

채용신 '영조 어진'

  • 인물화는 동서양 어디에나 있었다. 동양회화의 경우, 인물화는 유교적 이념 아래 권선징악의 역사적 교훈에 바탕을 두고 일찍부터 발전해왔다. 동양에서 특히 초상화가 발달한 데는 정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목적과 교훈적, 도덕적 목적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모습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기록적인 측면, 그리고 조상숭배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때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왕실과 귀족의 주도 하에 초상화가 그려지고 널리 보급됐다. 이후 조선시대에 특히 유교이념인 충효사상과 숭현사상을 기반으로 초상화 제작이 절정에 달했다.

  • 채용신,‘ 영조어진’, 조석진 이모, 203×83㎝, 1900년, 견
본채색,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 채용신,‘ 영조어진’, 조석진 이모, 203×83㎝, 1900년, 견 본채색,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우리가 흔히 보는 초상화에는 먼저 한 나라의 왕과 왕후 또는 공신(공을 세운 신하)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있다. 국가의 큰 난리를 수습해 공신으로 책봉되면 대례복을 입은 초상화를 그려주는 전통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유명한 승려와 일반 사대부의 초상화가 많고, 부부상이 남아있는 경우도 많아 초상화가 매우 다양하게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초상화를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는데, 초상(肖像), 화상(畵像), 도상(圖像), 진상(眞像), 진영(眞影), 영정(影幀), 영자(影子), 영첩자(影帖子), 유상(遺像), 영(影), 상(像), 진(眞) 등이다. 그중에 '참되다'라는 뜻의 '진(眞)'은 터럭 하나도 틀림없이 그려낸 우리 초상화의 성격을 잘 대변한다. 특히 왕의 초상화는 어진(御眞), 왕영(王影), 어영(御影), 진용(眞容), 성용(聖容), 수용(�v容)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화가의 최고영예, '어진화사'

    임금님의 초상화는 당대 최고의 화원화가들만이 그릴 수 있었다. 어진 화가로 발탁되는 것은 화가들에게 최고의 영예이자 출세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어진도감'이란 임시기구를 만들고서 예조판서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갖춘 인물을 감독관으로 정했다. 최고 고참 화가와 중견 화가 그리고 시종을 들어줄 화가까지 최고의 화가 5명을 뽑아 어진을 그려 바치게 했다.

    영조대왕은 선왕인 숙종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군신회의를 열어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르게 그려도 내 조상이 아니라 남의 조상이 된다"며 극도의 사실성을 강조했다. 물론 왕이 살아생전에 초상화를 그렸다면 실물과 닮게 그리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하한 뒤에는 생전의 왕과 비슷하게 생긴 종친을 모델로 그렸다. 어진이 완성되면 임금과 가까웠던 신하들이 모여 상의해서 덜 닮은 부분을 고치게 했다. 마치 요즘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 듯 사람들의 설명을 듣고 그려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어진은 경복궁과 창덕궁, 덕수궁 등 각 궁궐에 마련된 선원전(璿源殿)에 모셔졌다.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사, 채용신

    수많은 어진이 그려졌지만, 오늘날에는 전주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비롯해 영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만 남아 있다. 그 중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영조, 고종의 어진 뿐이고 영조의 연잉군 시절을 그린 초상화와 철종의 어진은 한국전쟁 때 절반가량이 불에 타서 전모를 볼 수 없다. 또한 이 모두가 1850년대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원본을 보고 후대에 그대로 모사한 '이모본'으로 당시에 그려진 어진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운데 우리가 어진화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영조 어진'이다. 조선 말기 화가 채용신(1848~1941)이 그린 것이다. 채용신은 흔히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사'로 불린다. 어진을 그린 마지막 화가이기 때문이다. 채용신은 무관출신으로 군수까지 지낸 관리였지만 그림을 잘 그려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로 발탁됐다. 조선왕조가 몰락하기 직전인 고종 때에 태조와 영조를 비롯한 7조의 어진을 모사하고 고종의 어진을 그렸다. 채용신은 조선시대 전통초상화법을 이어가면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한국회화 사상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화가로 남아 있다.

  • ※더 생각해볼 거리

    ―초상화는 인물화에 속하지만 특정한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인물화와 구분된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시대 이후에 많이 그려졌는데 사람의 얼굴을 실물과 똑같이 그린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인물화와 초상화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