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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배 작가의 서울 이야기] 덕혜옹주와 덕수궁(하)

소년조선

2009.12.17 09:53

37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당시 고종은 시종 김황진을 통해 비밀리에 추진하는 일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종은 김황진을 앞세워 이 일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김황진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일제 경무 총감부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고종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덕혜옹주의 약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덕혜옹주는 일곱 살 때 아버지인 고종을 여의고 열세 살 때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어머니인 귀인 양씨의 품을 떠나 동경 학습원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동경에는 오빠인 영친왕이 일본 왕족 마사코(방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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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양동석

1929년 5월 30일, 덕혜옹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친정인 충북 청주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그 소식을 들은 날, 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배를 타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덕혜옹주는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 지냈으며, 한밤중에 정원으로 나가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깊어져 갔습니다. 어떤 때는 영친왕 내외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덕혜옹주의 병이 악화된 1930년 가을,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다케시 백작과 옹주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듬해 봄 덕혜옹주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두 사람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덕혜옹주는 결혼하기 싫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강제로 시키는 결혼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이 편안할 리가 없었습니다. 덕혜옹주의 병이 재발하자 남편은 그녀를 학대했고, 결국 이혼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미사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도 어른이 되어서는 아주 불행했습니다. 결혼 생활에 실패하더니 현해탄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덕혜옹주는 평생 ‘조발성 치매증’(정신분열증)이라는 정신병에 시달렸습니다. 동경 근처에 있는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일본으로 끌려간 지 꼭 37년 만이었습니다.
덕혜옹주는 낙선재라는 곳에 살다가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비가 낳으면 '공주', 후궁이 낳으면 '옹주'
왕에게는 같은 딸이라도 누가 낳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달랐다. 왕의 정부인인 왕비가 낳은 딸이면 ‘공주’, 왕의 후궁이 낳은 딸이면 ‘옹주’에 봉해졌다.

공주, 옹주는 워낙 존귀한 신분이어서 대군, 군과 마찬가지로 따로 품계가 없었다. 서열로는 정1품 영의정보다 높다고 볼 수 있어 영의정보다 높은 봉급을 받았다. 그리고 왕궁의 잔치, 혼인 및 초상 등 모든 행사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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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공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그 명칭이 정확하지 않아 왕의 후궁이 낳은 딸까지 공주라고 불렀다. 성종 때에 이르러서야 공주와 옹주를 구분했다.

우리나라에서 ‘옹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다. 공양왕 때는 왕자의 정부인, 왕의 조카딸, 종친들의 정부인, 왕녀들까지도 모조리 옹주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왕의 후궁, 대군의 부인, 종친의 딸, 개국 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니까지 옹주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후궁이 낳은 딸만을 옹주라고 부르게 된 것은 세종 이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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